오늘의 복음과 묵상

1/19 복음과 묵상

메옹 2018. 12. 26. 13:13

2019년 1월 19일 토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인간이라 믿는 의인, 하느님이라 믿는 죄인

어느 날 새끼 호랑이가 엄마와 풀밭에서 재롱을 떨며 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끼 호랑이가 어미 호랑이에게 물었습니다.

“나 호랑이 맞아?

달리기도 못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고 사냥도 못하는 내가 호랑이 맞아?”

어미는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낳은 새끼니까 너는 틀림없는 호랑이다.”


또 물어 봅니다.

“강아지만도 못한데 나 호랑이 맞아?

난 아무 것도 못하는데 내가 호랑이 맞아?”

자꾸 물어보니까 화가 난 어미 호랑이가

“그래, 너 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호랑이가 개이고 싶은 이유는 개라면 그래도 괜찮은 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호랑이라면 못난 호랑이인 것입니다.

제가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라는 책에서 “여러분은 사람입니까, 하느님입니까?”를 질문하고

“여러분은 하느님입니다. 만약 사람이라고 대답하셨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읽고 잘 받아들이지 못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여기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고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맞는 의견 같지만 사실 틀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이라 믿었으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고 믿으니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만이 바칠 수 있는 기도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 믿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하느님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이 오히려 교만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인데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인데도 인간이라고 계속 믿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믿어야 하느님 자녀로서 온전하지 못한 모습에서 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어버리면 의인이 되고 하느님이라고 믿어버리면 죄인이 됩니다.

그렇다고 다시 인간이라 믿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느님이라 믿으며 그 죄책감을 참아내고 더 하느님답게 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인간이라고 믿으며 인간 중에서 그래도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기며 사는 것보다는

하느님이라 믿으며 죄인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매우 거슬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들 중 매우 뛰어난 인간들이라 믿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일 수도 있음을 믿습니다.

오히려 이런 죄인들을 예수님은 선호하십니다.

인간이기를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너는 하느님의 자녀다. 하느님이다.”라고 말해주기가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행위로 인간임을 즐기는 이들이기에

하느님의 자녀라 믿게 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것이 됩니다.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가 되고 사람이라고 믿으면 사람이 되며

하느님이라고 믿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믿는 본성대로 행동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느님의 자녀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이 누리는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느님과 같음에도 굳이 또 ‘하느님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이라고 믿지 못하니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면 하느님처럼 살지 못합니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하느님임을 믿어야합니다.


부족한 호랑이가 낫지 개라고 믿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서 모든 죄가 시작됩니다.


인간이라 믿고 의인으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이라 믿고 죄인으로 살아갑시다.

인간이라 믿는 사람은 인간 중 뛰어난 인간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인정받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녀라 믿어버리면 그 모습에서 참으로 죄인임을 느끼겠지만

세상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The Nativity Story,  

네티비티 스토리 - 위대한 탄생


신이 된 한 아이의 탄생 비밀
예수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베들레헴으로의 여정
 
기원이 시작될 무렵, 헤로데 왕의 가혹한 독재정치는 점점 그 힘을 더해가고 높아가는 세금과 가난으로 인해 유다에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는 자들이 늘어만 간다.

한편 가난한 마리아의 아버지는 마리아를 목수 청년 요셉과 결혼시키기로 한다.

그것은 그들 가족의 안전과 마리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

그러나 아직 16살에 불과한 어린 마리아는 갑작스런 결혼 이야기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던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온다.

그는 그녀에게 하느님에 의해 선택 받은 자라 칭하며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고 그가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것도 혼란스러운 차에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이라니...

게다가 유다에서 미혼모는 경멸과 치욕의 대상이 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신의 계시를 받아 들이기로 하고 역시 하느님의 계시로 노년에 임신을 한 엘리사벳을 찾아가는데...

엘리사벳을 통해 더욱 믿음을 확신하게 되는 마리아는 역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수 탄생의 예언을 접한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으로의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성탄절 거리 풍경은 해가 갈수록 볼썽사납다.

주인공 예수는 오간데 없고 상점 앞에서 손짓하는 산타클로스만 넘쳐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보다

더 가슴 뛰게 하는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영화 '네티비티 스토리(The Nativity Story) - 위대한 탄생' (감독 캐서린 하드윅)은

성탄의 본래 의미는 망각한 채 소비와 축제에 취해 있는 현대인들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나자렛의 가난한 집 딸 마리아와 목수 요셉이 어떻게 예수를 탄생시켰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당시 유다사회에서 처녀 임신은 조롱을 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돌팔매질까지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예언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며 순종하지만 두려움과

긴장을 감추지 못한다.

요셉 역시 약혼자의 임신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메시아 잉태는 마리아에게나 요셉에게나 똑같이 감당하기 벅찬 사건이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으로 하느님 구원계획에 따른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까 아내로 맞아들이고, 이집트로 가라고 하니까 길을
나선다.

배 부른 마리아를 나귀에 태워 사막의 밤길을 헤쳐 나가는 그의 지친 발걸음은 침묵의 순종이 얼마나 거룩한 덕목인가를 말해준다

.

 

 

예수를 소재로 한 영화나 공연은 수없이 많다.

예수를 사랑하는 막달라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뮤지컬 '마리아 마리아'와 유다를 앞세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장기공연 중이다.

성경에서 소재를 빌려오거나 성경을 재해석해 드라마틱한 재미를 덧입힌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루카복음과 마태오복음에 기록된 예수 탄생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평가해도 좋을만큼 상황을 충실하게 묘사했다.

전자를 달콤한 맛이 나는 크림빵에 비유한다면 후자는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밀빵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과 대사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진가가 느껴진다.
제작진은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 마을을 복원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는 후문이다.

나자렛 들판 풍경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촬영한 이탈리아 남부 마테라에서

담았다.

할리우드에서 폭넓은 감성연기로 주목받는 케이샤 케슬 휴즈가 마리아역을 맡았다.

요셉역은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끼를 발휘하는 오스카 아이삭이 맡아 열연했다.
우리에게 낯선 얼굴이라서 그런지 이들의 절제된 내면 연기가 더 신선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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