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1/30 복음과 묵상

메옹 2018. 12. 30. 01:20

2019년 1월 30일 수요일

[(녹) 연중 제3주간 수요일]



복음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3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9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12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3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15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 버린다.

16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17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18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0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진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걱정하면 예수님은 숨 막힌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인 씨가 각자의 마음 밭에 뿌려져

어떤 결과를 만드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어떤 것은 길 위에 떨어져 새들이 쪼아 먹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어떤 씨는 돌밭 위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을 것 같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들어버립니다.


어떤 것은 잘 자라다가 가시덤불에 숨이 막혀 죽어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에 떨어진 것들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주님의 밭이 되었기에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된 영혼을 가리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그 이유는 각자의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결정합니다.

내가 새라고 믿으면 새처럼 날려고 할 것이고 동물이라 믿으면 동물처럼 살 것입니다.


만약 나이아가라 폭포 위 흘러가는 얼음 덩어리 위에

새와 염소가 동시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조금 있으면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염소는 걱정하게 되고 새는 기대하게 됩니다.

염소는 죽을 걱정을 하고 새는 절벽 위를 신나게 나는 즐거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렇듯 각 존재마다 자신에게 걱정을 주는 대상이 다릅니다.

자신 밭 위로 떨어지는 말씀의 씨앗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걱정해야 할 존재라고 믿고 있기에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세상 걱정만 합니다.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세상 것들뿐입니다.

자신이 걱정하지 않으면 세상이 망하는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의 길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구원의 말씀을 들으면 이 세상 걱정에서 벗어나는 기쁨과 희열을 느낍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세상 걱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돌밭과 같은 사람입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정작 어려움이 닥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음이 드러나는 부류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지만

막상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그 걱정과 두려움에 하느님을 잊습니다.


걱정은 가시처럼 주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게 목을 조여 옵니다.

걱정이 많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새가 절벽 앞에서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들국화 밴드의 전인권씨는 “그대여, 아무 걱정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냥 지금 있는 걱정들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심리치료도 이와 같이 합니다.


불안이 많은 이들은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들도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합니다.

기차역에 들어오는 모든 기차들이 ‘나의 기차가 아닌가?’를 걱정하며 기다리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때가 되면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그냥 그런 생각들은 지나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 우리와 관련 있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버릴 것입니다. 내가 타야 하는 기차가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말씀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걱정해야 걱정할 일이 안 일어날 것 같지만

모든 걱정할 일은 너무 걱정해서 발생합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벳 속담이 있습니다.

걱정은 주님 말씀이 싹트지 못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손만 대면 금으로 변하는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이 세상 걱정들을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가 재벌의 아들이었음을 믿는다면 내가 잃게 될 이 세상 작은 돈들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걱정할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내 안의 모든 걱정을 감사로 바꾸며 살아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벗님들

안녕하십니까.

김진홍목사의 묵상글에 보니 금년이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르킨지 495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당시 95개조의 개혁조건을 제시하였는데 현재에 와서는 어떤지 반성해야한다고 하지요.

개신교고 천주교고 현재는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이에 중앙시평에 이우근대표가 글을 올렸는데 수긍이 가는지라 여기에 옮겨봅니다.

범우 10월30일.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교황의 면죄부 발행을 비판하는 95개조의 항의문을 내걸었다. 종교개혁을 향한 기나긴 고난의 첫걸음이었다.

루터의 항의문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로 지속돼야 한다”는 제1조 를 시작으로 “그릇된 평화의 위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간다”는 제95조로 끝을 맺는다.

처음이 참회, 마지막이 고난이다.



성서의 역사는 끊임없는 개혁의 발자취다.

천지창조 자체가 카오스를 깨뜨리는 코스모스의 혁명이었고, 모세의 이집트 탈출은 모든 해방운동의 선구가 되었으며, 뭇 예언자들의 열정은 ‘우상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영적 개혁의 목표로 모아졌다.

예수는 율법으로 대표되는 제도 종교의 사슬을 끊고 ‘오직 진리만이 인간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는 확신으로 영성(靈性)의 개혁을 외치다가 십자가에 달렸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그 거대한 두 산맥을 정복하는 개혁의 여정에 다름 아니었으며, 요한 묵시(默示)의 절정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옛 하늘과 옛 땅’을 최종적으로 개혁하는 성서의 이상향(理想鄕)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부패한 세리, 타락한 매춘부, 천대받던 이방인 등 온갖 비천한 사람들을 아무 차별 없이 친구로 품어 안았지만, 최고 종교 권력자인 대제사장과 권위 있는 율법학자인 서기관들에게는 무서운 분노를 뿜어냈다.

유대교의 신정(神政)체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제도 종교의 기득권자들은 이를 갈며 예수를 죽일 궁리에 골몰했다.

예수의 거룩한 분노는 영혼의 자유를 옥죄는 위선적 종교권력에 대한 엄중한 질책이었고, 이 질책은 교황청에 대한 루터의 항의(protest)로 계승되었다.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르는 이유다.

루터의 95개조는 참회로 시작해 고난으로 끝난다.

한국 개신교의 모토는 무엇인가? 회개와 고난인가, 축복과 형통인가?

뉘우침의 회(悔)만 있고 고침의 개(改)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영혼의 숨결이 종교적 의식(儀式)으로 대체되고 웅장한 성당이 호화로운 예배당으로 바뀐 데 불과하다면, 개신교 역시 또 하나의 형해화(形骸化)한 제도 종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만약 루터가 이 시대, 이 땅에 살아있다면 95개조가 아니라 아마도 950개조는 써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상대로 말이다.

수천억원대의 화려한 교회당 안에서 집 없고 가난한 이들이 무슨 위로를 받을 것인가?

으리으리한 대리석 강단에서 어떻게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를 전할 것인가?

교단 총회에 가스총이 등장하는 마당에 무슨 입으로 이 폭력의 사회를 꾸짖을 것인가?

성추문에 휩싸인 목회자들이 무슨 낯으로 소돔 같은 오늘의 타락상을 질책할 것인가?

숱한 교파들로 분열된 개신교가 이념·세대·지역·계층으로 갈가리 찢긴 분단의 조국에 어떤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초대교회의 지도자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와 아무 혈연이 없는 베드로였다.

성서의 사도직은 세습되지 않는다.

부유한 대형교회의 강단을 혈육에게 물려주면서 사회의 양극화를 걱정하고 빈부(貧富)의 대물림을 비판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위선이 아니다.

 

보다 못한 감리교단이 뒤늦게나마 목회 세습을 금지하는 장정(章程)을 만들었지만, 필요한 일이기는 해도 씁쓸한 느낌을 거두기 어렵다.

 

성서만으로는 정녕 부족했던가? 성서보다 교단의 계율이 더 큰 힘을 가진다면 ‘오직 성서’라는 루터의 믿음을 버리고 다시금 율법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다.

종교의 사회적 책임은 막중하다.

한국의 종교 인구는 53%에 이르고, 개신교 신자는 전 국민의 20%에 육박한다.

지난날 한국 교회는 국가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해왔지만, 지금은 도리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자신이나 친족의 비리로 국민을 분노케 한 이들이 많았는데, 대형교회의 장로였던 대통령들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은 신앙의 슬픔이자 교회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정통의 신조를 벗어난 교리의 이단(異端)보다 신앙윤리를 저버린 ‘삶의 이단’이 더 무섭고 더 악마적이다.

교리나 제도의 개혁보다 인격과 삶의 쇄신이 더욱 절실하다는 뜻이다.

지난날 한국 교회는 국가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해왔지만, 지금은 도리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종교개혁은 완료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reformata et semper reformanda) 오늘과 내일의 과제다.

한국 교회가 기복(祈福)과 형통의 넓은 길을 버리고 참회와 고난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오늘의 95개조를 새롭게 써 나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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