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1/22 복음과 묵상

메옹 2018. 12. 27. 13:35

2019년 1월 22일 화요일

[(녹) 연중 제2주간 화요일]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남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일본 영화 ‘너는 착한 아이’의 주인공은 남들이 볼 때는 아이를 참으로 잘 대해주면서도 아이를 학대하는 엄마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있을 때는 아이에게 손찌검을 자주합니다.

안하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죄책감에 혼자 울기도 하지만 또 제자리걸음입니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어머니는 어렸을 때 똑같은 학대를 당하며 자랐습니다.

받은 대로 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할까요?

영화에서 이 엄마는 자신과는 다르게 아이를 대하는 옆집 어머니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학대받으며 자랄 때 옆집에 어떤 할머니가 혼나고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주며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 ...” 라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매보다 할머니의 포옹을 믿으며 자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폭력을 쓰는 주인공 어머니를 안아주며 같은 말을 해 줍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매는 없습니다.

매는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폭력입니다.

소중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온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통제는 존재에 대한 폭력입니다.

존재는 폭력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런데도 통제를 당하며 자란 아이는 법이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습니다.

통제의 수단은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본인 스스로 믿지 못하기에

타인도 같은 방식으로 통제하려합니다.

부모에게 그렇게 배웠기 때문입니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면 아이는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며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은 다윗도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었는데

당신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것으로 허기를 좀 때웠다고

무엇이 문제냐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법에 의해 통제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법을 통해 자유로워지라고 주신 것입니다.

법으로는 우리가 변할 수 없음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변할 수 있음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통제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도 그렇게 통제를 당해야만 하는 수준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기계가 아니라 자녀를 탄생시키려고 하십니다.

자녀는 율법으로 탄생되지 않고 믿음으로 탄생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당신이라고 하시며 당신이 안식일을 통제하지

안식일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녀는 법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부모님의 자녀라는 믿음에 의해 자신을 이깁니다.

자유를 주는 것은 “너는 소중한 존재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통제하는 것은 “너는 통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통제를 받아야하는 것은 가축이나 물건입니다.

자녀를 지나치게 통제하면 그렇게 누군가에게 통제를 받아야만 온전할 수 있는

자존감 없는 아이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듯 타인도 그렇게 통제하며 비인간적인 사람이 됩니다.

율법으로부터 통제받지 않으려면 그 율법의 목적인 죄를 짓지 말아야합니다.

죄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죄를 이겨 누구도 통제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면

참으로 율법의 주인이 되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믿음으로 죄를 이기게 되었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내가 죄인일 때 나는 율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그러면 또 누군가를 율법으로 가두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가두는 사람이라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통제받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는 법이 없어도 자녀입니다.

우리는 아무 통제가 없어도 우리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통제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의로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법으로부터 자유로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통제하는 사람은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믿음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타인도 법이 아닌 사랑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無神論과 有神論

 

불교는 무신론의 종교요, 기독교는 유신론의 종교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의 당연한 결론으로서 불교는 自力主義의 종교요,
기독교는 타력주의(他力主義)의 종교라는 명제가 생긴다.
먼저 불교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무신론 위에 서는 종교다.
불교는 불타의 가르침인 동시에 사람은 누구나
다 불타(佛陀)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신(神)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불타는 신도 아니요,
또 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사람도 아니다.
그는 한 인간이었다.
6년의 수도(修道) 끝에 인생의
대진리를 깊이 깨달은 자가 된 것이다.
불타는 완전한 각자(覺者)다.

 

 

 

 

사람은 누구든지 진지한 수도를 하면 불타,
즉 완전한 각자가 될 수 있다.
신(神)의 은총이나 성령(聖靈)의 힘이 필요치 않다.
불타는 하나의 이상적 인간상(理想的人間像)이다.
그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완전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의 인격을 이루었다.
그가 깨달은 진리의 내용이 불교이거니와,
그 진리의 내용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진리다.
'불법(佛法)에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불교에 의하면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自己와 진리밖에 없다.
신을 믿을 필요도 없고 신의 힘을 의지할 필요도 없다.
나는 自力으로 나를 구원할 수 있고
나는 불성(佛性)을 지니기 때문에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의
자유자재경(自由自在境)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곧 부처다. 심즉불(心卽佛)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믿고 의지할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무엇을 인생의 등불로 삼고 살아갈 것이냐.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발판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석가는 자기 자신과 진리 이외에
믿고 의지할 것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내가 나의 등불이요(自燈明), 진리가 나의 등불이다(法燈明).
내가 나의 의지처요(自歸依),

진리가 나의 의지처다(法歸依)'라는 이 유명한 명제는
불교가 얼마나 자력주의의 종교인가를 웅변으로 실증한다.

석가는 운명하면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말을 이렇게 말했다.
'게으르지 말고 노력하라.'
그는 인생의 부단한 정진을 강조했다.

오직 자기와 진리를 믿고 쉬임없이
노력하라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요, 하느님이 우리의 등불'이라고
믿는 기독교의 타력주의적 신앙과 불교의 자력주의적 신앙은
종교적 자세에 있어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유신론과 타력주의(他力主義)의 종교다.
기독교의 신은 어떠한 신인가.
파스칼은 그의 유명한 종교적 회심(回心)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의 신(神), 이삭의 신, 야곱의 신,
철학자 및 식자(識者)의 신이 아니다.'
자기가 믿는 성서의 신은 옛날 아브라함이 믿었고
이삭이 믿었고 또 야곱이 믿었던 신이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제일원인(第一原因)으로서의 신이나
형이상학적인 추상신(抽象神)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신은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인격신이다.

 

 

 

 

인간은 불타가 될 수는 있어도 신이 될 수는 없다.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修道에 의한 구원과 해탈이 가능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자력주의에 의한 자기구원은 불가능하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빛은 내 속에 있다. 이것은 불교적인 인간관이다.
빛은 나의 밖에 있고 나의 위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 비로소 빛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적 인간관이다.
이상에서 나는 기독교와 불교의 기본적 차이를 대비해 보았다.
불교는 고(苦)의 원리와 자각의 방법과
무신론의 입장과 자력주의를 토대로 하는 理性의 종교요,
기독교는 죄(罪)의 원리와 신앙의 방법과
유신론의 입장과 타력주의를 토대로 하는 초이성(超理性)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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