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8/3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2. 28. 18:38

2019년 8월 3일 토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작은 죄도 짓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


영국 성공회는 헨리 8세가 현 왕비와 이혼하고 재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종교입니다.

왕이 재혼을 하고 싶다는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자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한 번 혼인하면 그 혼인의 유대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에 헨리 8세는 가톨릭교회와의 연을 끊고 자신이 교회의 수장이 됩니다.

모든 전례나 예식은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따르지만 자신이 교황의 자리에 앉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분열이라는 것이 그의 작은 욕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작은 죄는 더 큰 죄를 짓는 밑거름이 됩니다.

이에 적극 반대하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던 인물이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 성인입니다.

영국의 대법관까지 역임하고 높은 지위의 정치인이었던 그는 왕의 그러한 행위를

보고 있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멈추지 않고 충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던 헨리 8세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마스 모어는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토마스 모어와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물론 헨리 8세와 같은 인물은 헤로데 왕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죄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혼은 구원받고 싶어서 믿으려 했던 인물들입니다.

헤로데 왕도 세례자 요한의 쓴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목을 베게 만듭니다.

죄에 사로잡혀 믿는 하느님은 언제나 우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부처나 알라신 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숭배는 하느님을 믿지만 자신이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 모습이 그들의 죄에 가려진 눈 때문에 변형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이렇듯 죄를 지으면 믿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우상숭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용서해 주신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죄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자비보다는 자아의 판단을 더 믿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라고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건 죄다, 아니다”만을 말해줍니다.


마치 도로의 중앙선과 같습니다. 넘

었는지, 넘지 않았는지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책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자아’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믿느냐, 하느님을 믿느냐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아를 믿었기에 죄책감이 생겨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다면 주님께 자비를 청하며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아를 믿는 이를 에덴동산에 두실 수 없으십니다.

자아가 또 다른 하느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믿고 싶어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자아에게 더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됩니다.


죄에 자꾸 빠진다면, 자아가 “거봐. 용서해 주면 뭐하니? 또 죄를 짓잖아.

너는 주님께 합당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 때문에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헤로데가 예수님을 정신병자처럼 이상하게 바라본 것처럼,

죄에 빠진 우리들도 각자가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들어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이 죄책감은 나의 ‘자기 충족적 예언’이 됩니다.

어차피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한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신이 정해주는 만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사람들은 아무리 행복이 오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 행복을 스스로 차버리게 됩니다.

돈을 주어도 받지 않고, 용서를 해 주어도 화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스스로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를 도와주면 더 큰 만족이 온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알더라도 그들이 정해 놓은 행복은 그저 성전에서 봉사하는 가운데 얻는 보람 정도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야 그에 합당한 행복을 받을 그릇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이거구나!”라고 외치며 사랑을 실천합니다.

그 사랑실천을 통해 오는 만족감이 자신이 잘 살아온 상급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 “하느님께서 상을 언제 주실까?”라는 마음이어야지

행복이 오는 순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같은 행복을 부어주시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그 행복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준비란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절반의 빵


미국이 경제공황 때 많은 사람이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취업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헤맸으나 일자리를 찾기도 힘들었고 가난과 궁핍을 벗어나기도 힘들었습니다.

한 청년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주머니에는 지폐 한 장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빵 한 덩어리를 샀지만 이걸 먹고 나면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던 청년은 구걸하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든 청년은 자신이 가진 전부라 할 수 있는 빵을 반이나 잘라 노인에게 주었습니다.

청년은 노인이 빵을 허겁지겁 먹을 줄 알았는데, 노인은 지나가던 구두닦이 소년에게 받은 빵의 반을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굶은 듯 마른 구두닦이 소년은 노인과 청년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뛰어갔습니다.

그런데 빵 냄새를 맡았는지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달려와 뛰어가던 소년의 다리에 매달려 낑낑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자신이 받은 빵의 반을 잘라 강아지에게 주었습니다.

한 번 빵의 맛을 본 강아지는 이제 가장 큰 빵을 들고 있는 청년에게 달려와 다시 낑낑거렸습니다.

청년은 강아지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마음이 들어 남은 빵을 조금 떼어 강아지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개목걸이에서 강아지 주인의 주소를 확인했습니다.

청년은 강아지를 안고 주인을 만나러 찾아갔습니다.

그는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 기뻐하던 주인은 청년에게 사례금을 주고 이렇게 심성이 좋은 사람이라면 함께 일하고 싶다며 일자리까지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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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상을 향해 베푼 나눔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아름다운 나눔이 더해지고 커져서 언젠가 부메랑처럼 당신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베풀고 정을 나눈다면 분명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나눔은 우리를 '진정한 부자'로 만들며,

나누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또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 테레사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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