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왕이 선포했던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92~1750년)의 골자다. 법전에 기록된 내용은 더 구체적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자신의 눈알도 빼야 한다. 다른 사람의 뼈를 부러뜨리면 자신의 뼈도 부러뜨려야 한다. 부모를 구타한 자식은 손목을 자른다. 구멍을 통해 남의 집에 들어가 도둑질한 자는 그 구멍 앞에서 사형에 처한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복음 5장44절)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표정이 어땠을까. 황당하지 않았을까. 복수를 해도 속이 풀릴까 말까한데 말이다. 예수는 “원수를 잊어버려라”가 아니라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예수의 출생 전부터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다. 높다란 바위 언덕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벽은 탄탄했다. 유대인들은 항전을 택했다. 폼페이우스는 안식일까지 기다렸다. 율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군사 행동도 하지 않는다. 폼페이우스는 그걸 노렸다. 안식일에 그는 성(城)을 공격할 공성 병기를 위해 높은 토담을 쌓았다. 그걸 바탕으로 예루살렘 성에서 가장 높은 성탑을 무너뜨렸다. 탑과 함께 성벽이 무너졌고, 벽이 갈라진 틈으로 로마 병사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됐다. 당시 2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프란체스코 헤이즈의 1867년작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는 광경을 그렸다.
갈릴리의 언덕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청중은 다들 ‘각자의 원수’를 떠올렸을 터이다. 누구에게는 로마의 군대이고, 누구에게는 자신의 이웃이고, 또 누구에게는 가족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원수들’을 향해 예수는 파격적 행동을 제안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어찌 될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의 자녀’가 뭘까. 아버지를 닮은 이들이다. ‘신의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길’이 담겨 있다. 무슨 길일까.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길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에서 봉사활동만 하면 그 길을 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건 율법만 지키면서 그 길을 간다고 생각했던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착각’과 무엇이 다른 걸까. 예수는 정확하게 지적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손 목사는 몸소 따라갔다. 그렇게 ‘길’을 갔다. 손 목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는 충격과 감동을 받는다. 그러면서 되묻는다. “그건 성자들에게나 가능한 일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지고 볶는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 아닌가.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일까?”

경남 함안에는 산돌 손양원 목사의 기념관이 설립돼 있다. 손 목사는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렀고, 소외 받던 한센인들을 가족처럼 돌보며 사랑을
실천했다. [사진 손양원 목사 기념관]
이유가 있다. 그게 뭘까. ‘첫단추’를 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두 번째 단추만 안다. 정작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첫단추는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물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은 적도 없고, 거기에 답한 적도 없다. 성서를 관통하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이치’가 담겨 있다. 그 이치가 생략될 때 예수의 가르침은 그저 ‘따라야 할 명령’이 되고 만다. 그럼 복음도 짐이 된다. 유대인들의 어깨를 짓눌렀던 ‘율법의 짐’처럼 말이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5장45, 48절)
그렇다. 예수가 찍은 방점은 ‘완전함’이다. 하늘의 아버지가 완전하니 너희도 완전해라. 그게 예수의 바람이다. 그걸 위해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이제 우리의 첫단추가 보인다. 원수를 사랑하는 게 첫단추가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 첫단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그 아버지의 속성처럼 말이다.
그럼 예수가 말한 완전함이란 뭘까.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으라”고 할 때 ‘완전함’이란 뭘까. 이에 대한 답도 예수의 말 속에 이미 담겨 있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하느님’이다. 예수는 그걸 ‘완전함’이라 불렀다.
그리스어 성서를 찾아봤다. ‘완전함’이란 단어가 뭘까. ‘완전함’의 정확한 의미는 어떤 걸까. 그리스어로는 ‘텔레이오이(teleioi)’다. 거기에는 ‘완전한(perfect)’의 의미도 있지만, ‘완숙한ㆍ성숙한(mature)’의 뜻도 있다. 그러니 ‘쪼개진 절반의 그릇’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인 그릇’이다. 그럴 때 우리는 ‘성숙’해진다.
삶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다.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사람들은 그걸 양자택일의 문제라 여긴다. 그때부터 스스로 ‘절반의 그릇’이 되고 만다. 우리 앞에는 성장과 복지 등 숱한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들을 풀려면 다양한 열쇠가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우파의 열쇠가 통하고, 때로는 좌파의 열쇠가 통한다. 그럼 우리 사회가 가진 열쇠는 과연 몇 개일까. 꾸러미 속의 열쇠를 지혜롭게 꺼내서 좌우를 넘나들며 쓰고 있을까.
‘큰그릇’에 대한 메시지는 불교에도 있다. 중국의 혜능 대사는 늦은 나이에 출가했다. 그는 정식 승려가 되기도 전 행자(수련생)의 신분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스승인 홍인 대사는 그 점을 염려했다.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의 징표인 가사(袈裟ㆍ승려가 장삼 위에 걸치는 옷)와 발우(절집의 밥그릇)를 전하며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 밤을 틈 타 혜능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오조 홍인 대사. 모두가 잠든 밤에 혜능에게 『금강경』을 가르치며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혜능은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놓았다. 혜명은 그것을 들었지만 바위에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혜명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온 것은 불법(佛法)을 구하기 위함이지, 가사를 빼앗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발 행자께서는 제게 불법을 보여주시오.”

경남 양산 신흥사의 벽화. 혜명이 가사를 들려도 해도 바위에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육조 혜능 대사. 중국 대륙에 선불교의 꽃을 활짝 피운 장본인이다.
예수의 어록에 힌트가 있다. “그분(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신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을 비추지도 않고, ‘선한 사람’을 비추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을 비출 뿐이다. 그래서 똑같이 비를 내린다. 여기에도 비가 내리고, 저기에도 비가 내린다. 비에 젖는 땅만큼 내 그릇의 크기도 드러난다.
‘원수’는 왜 생겨날까. 잣대 때문이다. 잣대의 왼쪽은 선, 오른쪽은 악이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원수’가 된다. 예수의 말처럼 그 원수를 사랑하면 어찌 될까. 선악을 가르던 잣대가 무너진다. 그게 무너지면 어찌 될까. 우리는 돌아간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간다. 혜능이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고 한 이유도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선과 악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완전함’이다.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
이걸 알면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원수를 사랑하는 일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오르기 힘든 히말라야의 산봉우리가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의 친근한 야산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온전한 그릇’이 되는 게 목적이니 말이다. 골고루 비를 뿌리면, 그 비에 젖는 땅만큼 내 그릇도 커질 테니 말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89년 작 ‘비 내리는 밀밭’.
내가 적실 수 있는 땅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지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 후배는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런 질문을 처음 받는다는 듯이.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지옥이 지옥에 있지.” 나는 다시 물었다. “지옥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생각해? 아니면 ‘하느님 밖’에 있다고 생각해?” 후배는 생각에 잠겼다. “지옥은 하느님 밖에 있잖아. 천국이 하느님 안에 있고.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거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천국에만 비를 뿌리고, 지옥에는 비를 뿌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천국에만 해가 뜨고, 지옥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래서 지옥은 ‘하느님 밖’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물음이 올라온다. 그건 ‘큰 하느님’일까, 아니면 ‘작은 하느님’일까. 그건 ‘완전한 하느님’일까, 아니면 ‘불완전한 하느님’일까. 그건 ‘원수를 사랑하는 하느님’일까,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하느님’일까. 요한복음은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1장3절)고 말한다. 거기서 ‘지옥’만 예외가 되는 걸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복음 5장48절)
그래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명령이 아니다. 율법도 아니다. 아득하기만 한 산봉우리도 아니다. 그건 반쪽짜리인 나를 온쪽짜리로 만드는 ‘이치의 팁’이다. 그 팁이 우리의 그릇을 커지게 한다. 그렇게 그릇이 커질 때 만나지 않을까. 예수가 설한 ‘텔레이오이’를 우리가 만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