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을 좋아하느냐?”
“매콤해서 좋다.”
“유대인은 음식을 먹을 때도 지켜야 할 율법이 많지 않나?”
“나는 정통파 유대교인은 아니다. 성경보다는 과학을 더 의지한다. 유대 율법에는 소고기와 소에서 나오는 우유나 치즈를 함께 먹지 말라고 한다. 가령 소고기를 먹었으면 6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유나 치즈를 먹을 수 있다.”
자신은 그걸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소고기와 치즈를 동시에 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럼 기내식에서 소고기와 치즈가 같이 나온다면 어떡하느냐?”
“소고기를 먼저 다 먹어서 끝내고, 그 다음에 치즈를 먹는다. 소고기를 끝내기 전에는 치즈를 먹지 않는다.”
스스로 과학을 더 중시한다는 유대인에게도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율법의 영향력은 아주 컸다.
이유가 있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다. 구약의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에게서 율법을 받았다. 율법은 신과의 언약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은 구원을 약속한다. 모세가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일)를 행하지 않자 구약의 하느님은 모세를 죽이려 했을 정도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배경이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복음 5장17절)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20절)

렘브란트의 ‘예수의 설교’.
율법은 일종의 고속도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빠른 길이다. 예수도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마태복음 5장19절)이라고 했다. 율법의 목적지는 부산이다. 부산에 도착해야 한다. 그걸 위해 율법을 지키며 고속도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을 중시한다. 세월이 흐른다. 1년, 2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흐르고 1000년, 2000년이 흐른다.
그 와중에 주객(主客)이 바뀐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다. 율법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갈수록 엄격해진다. 율법을 어기는 이들에게 가혹해진다. 어느새 율법 자체가 ‘눈 앞의 목적’이 돼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부산’을 잊고 만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가를 잊어버린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지도 않는다. 얼마나 세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오직 그것만을 따진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부산’을 망각했다. 부산을 향해 나아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었다. 그게 율법이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어디로 가고자 함인가?”“당신이 붙들고 있는 가드레일이 목적지인가, 아니면 부산이 목적지인가?” 예수는 설교를 통해 그렇게 묻고, 또 물었다.

유대교 회당에서 설교하는 예수.
2000년 전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으면 저절로 부산으로 간다고 믿지 않았을까. 그러니 예수의 지적이 지독하게 부담스러웠을 터이다. “우리가 옳아. 우리는 부산으로 가고 있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들에게 예수는 “거기는 부산이 아니야. 너희는 도로 위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야”라고 말했으니 말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부활’을 봤다. 거기서도 예수는 유대 율법사회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 1순위’로 나온다. 영화에서 유대의 제사장과 사제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주검까지 철저히 감시해 달라며 두려움에 떨었다. 그만큼 예수의 메시지가 그들의 세계에는 위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예수의 십자가형을 주장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박제가 돼 굳어가는 유대 율법의 심장을 찔렀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떠한 사유나 논리나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냥 ‘꽝 !’하고 쳤을 뿐이다. 폭풍처럼 후려치는 강고한 펀치였다.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인간의 삶이 정말 순간이구나. 그럼 뭘 해야 하지?” 잠시 후 답이 올라왔다.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뤘던 것. 그걸 하자. 언제? 지금 당장!” 그런 뒤에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왜 갠지스를 특별하다고 하는지 말이다.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양, 그건 사실 ‘자기 자신’이었다. 유대인들이 그 광경을 아무런 감정 없이 쳐다봤을까. 장작더미에 불이 붙고, 연기가 치솟고, 붉게 드러난 양의 살이 불에 닿고, 바람이 불고, 불길이 더 거세지고, 그 속에 누운 양의 몸뚱이가 타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양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걸 통해 죄를 씻어내리지 않았을까.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는 유대의 ‘제사 코드’가 녹아 있다. 2000년 전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란 열망이 유대인에게는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사람들을 끌어 모아 창과 칼을 들고 로마의 군대에 맞서 ‘식민지 해방’을 일굴 것을 기대했다. 예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죽음’. 유대인들은 어떻게 봤을까.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렘브란트의 ‘세 개의 십자가’.
이 대목에서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많다. “이걸 믿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2000년 전 예수의 죽음과 나의 죄,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왜 나의 죄가 사해지는가. 더구나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는다니, 그건 또 무슨 마케팅인가. 그게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무엇이 다른가. 그냥 믿기만 하면 ‘죄사함’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건가. 그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소연하는 그리스도교인들도 여럿 만났다.
반면 ‘죄사함’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교회를 다니고,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하고, 예수님도 믿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셨다. 그러니 나는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대개 이런 사람들은 큰 고민이 없다. ‘천국행 티켓’을 이미 거머쥐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불타는 시신에 나를 대입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장작 위에 올라가 누웠기 때문이 아닐까. 모세 당시의 화목제도 그렇다. ‘제물 따로, 나 따로’에도 씻어내림이 작용했을까. 그렇지 않다. ‘강 건너 불구경’하는 이의 가슴에는 불이 붙지 않는다. 장작 위에서 불타는 양을 보며 에고의 마음도 타야 한다. 그래야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중국의 마조(馬祖ㆍ709∼788) 스님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회양(懷讓ㆍ677∼744) 선사가 물었다. “좌선을 해서 무얼 하려고 하는가?” 마조가 답했다.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회양 선사는 저만치 가서 벽돌을 하나 들고 왔다. 그리고 ‘쓱싹, 쓱싹’ 갈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조가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에 쓰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듭니까?”
“그럼 좌선을 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이 말에 회양 선사가 답을 했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옳은가.”
이 일화는 불교의 가슴만 찌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가슴도 찌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한 길에서 나는 무엇을 때리고 있나. 수레인가, 아니면 소인가.’ 마조는 훗날 대선사(大禪師)가 돼서 유명한 선구(禪句)를 남겼다. “평상심이 도(道)다! (平常心是道).”그는 왜 평상심을 도라고 했을까.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지지고 볶는데 말이다.
영화 ‘부활’에서는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커다란 대못이 나의 손을 뚫고, 나의 발을 뚫고 들어와 나무에 박힌다. 그 다음에 땅에 눕혀져 있던 십자가가 세워진다. 그럼 자신의 몸무게로 인해 몸이 아래로 축 처진다. 그때 손과 발을 뚫은 대못이 주위의 뼈를 짓누른다. 몸무게로 인해 손과 발의 뼈가 바스러지기도 한다. 고통은 극한에 달한다. 너무 고통스러워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그래도 죽을 수가 없다. 십자가형에는 이런 고통까지 포함됐기 때문이다. 사형수는 고통에 겨워서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 사형 집행인이 솜에 신포도주를 적셔서 코에다 대고 깨운다. 죄수가 다시 고통을 느끼도록 말이다. 그렇게 매달린 채 죽지 않고 며칠씩 가기도 한다. 그럼 몽둥이로 다리뼈를 부러뜨린다. 그게 십자가형이다.
그리스어로는 ‘피스티스(Pistis)’다. ‘신뢰하다’는 뜻이다.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에게 이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걸 뜻한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말이다. 그건 아주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信者)’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의 뜻은 그런 게 아니다.”
그걸 예수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 비로소 속성이 통한다. ‘신의 속성’이 통할 때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화목해진다. 그럼 어찌해야 할까. 남편이 아내를 알듯이,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우리도 예수를 알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렇게 예수 안에 거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예수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답을 던졌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복음 10장38절)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4장27절)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디아서 2장19절)

엘 그레코의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