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6/24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2. 25. 14:18

2019년 6월 24일 월요일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복음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오늘의 묵상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김새해 작가를 인터넷에 쳐보면 숙대 중문학과 졸업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실로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말합니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로인한 트라우마는 그녀를 폭식증과 거식증을 오가는 몸과 마음이

불안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의 사업부도로 그녀는 신분증과 건강보험증도 없이

10년간의 국제 난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화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짬짬이 돈을 모아 작품전시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삶은 버거운 짐일 뿐이었습니다.

가야할 곳이 보이지 않을 때는 죽음이란 것을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책을 읽고 또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삶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살도 빼고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기쁨도 잠시, 하루 소변 한 방울도 볼 수 없으리만큼 신장이 나빠져

삶과 죽음을 오가는 1년을 보내야만했습니다.


자녀를 갖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었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더불어 사회생활도 왕성하게 시작하여 인기 블로거, 인기 유튜버가 되었고 책도 출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책이라도 읽고 죽자.’는 생각으로 선물 받은 책을 읽다가

김새해 작가가 고생한 것에 비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고 안 죽기로

결심했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지금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합니다.

그녀는 현재 네 아이의 엄마입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아기의 숫자를 세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까지 다섯. 불과 십년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행복한 순간입니다.

정말 꿈만 같아서 자신도 꼬집어보고 남편 볼도 꼬집어본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미래에 행복한 삶이 마련되어 있는데도 지금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순간순간은 우리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부모가 마치 공부 잘하면 어느 대학 가고 그러면 어느 직장에 들어가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등의

내 삶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새해 씨가 어렸을 때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의 부모도 그러했을 것이듯,

누구도 나의 미래에 대해 결정해 놓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나의 미래는 하느님만 아십니다.

남이 그렇게 결정해 놓은 것을 내가 따라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라가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알기까지는 수없는 방황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이 또한 인생의 묘미일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제가 사제가 될 것이라고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제가 되어있으니 오히려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더 큰 확신을 줍니다.

오늘은 세례자 성 요한이 탄생한 날입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이 현실적으로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의 부부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는 아기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오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그런데 자칫 부모는 아이가 의사가 되기 위해, 판사가 되기 위해,

정치인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알려주려고 합니다.

그건 분명 하느님께서 그 아이를 위해 마련한 계획과 같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느님은 우선 세례자 요한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부모와 사람들의 기대를 버리도록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탄생했을 때 사람들은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와 아버지는 반대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며 의아해합니다.

아이의 미래를 마치 자신들이 알기나 한 듯 이름을 지으려하는

인간의 교만을 나타내는 장면인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즈카르야도 벙어리가 되었었습니다.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하자 그의 혀가 풀렸습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요한을 위해 그의 부모를 길들이셨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임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다시 의아해 하기 시작합니다.

즈카르야라고 했다면 그의 사제직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당연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는 주님께서 직접 보살피셨고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요한을 요한으로 쓰기 위해 먼저 부모와 사람들의 기대로부터

떨어뜨려 놓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집안 형편이 저를 낳을 정도가 안 되었습니다. 형 둘 키우는 것도 벅찼습니다.

그러나 딸을 낳고 싶은 마음을 주님께서 부모님께 넣어주셨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딸인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진통 때도 “이 계집애, 왜 이렇게 안 나와!”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런데 낳고 보니 또 아들이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딸로 나왔어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각자의 계획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부모나 다른 사람들이 해주는 말을 듣지 말고 우리 스스로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그것이 지금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열심히 찾고 살다보면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의 종착역은 주님만 알고계십니다.

주님의 창조 의도대로 살고 싶다면 주위의 나에 대한 의견에

휘둘리지 말아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아름다운 여인의 아름다운 이야기 !

1929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병원.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우리 딸이 며칠 전부터 심하게 기침을 합니다"
생후 3개월이 된 갓난아기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마른기침을
뱉어내는 아기는  한눈에 봐도 병색이 역력했다.

숙직 의사는 청진기로 이리저리
아기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닙니다. 백일해입니다"

"백일해요? 안 좋은 병인가요?“

"연령이 낮을수록 위험한 병입니다.
기관지 폐렴이나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인 무기폐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요.
이 아이는 조금 심각한 상태입니다"

의사에 말에 아기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꼭 좀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제 아기만은 꼭 살려주세요"

다행히도 아기는 의사와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걸음마도 떼기 전에 죽음의 문턱을
넘었던 아기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 열 살이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게 된 것이다 .

나치 추종자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고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좋아하는
꿈 많은 발레리나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가 문제였다.

발레리나는 신체적인 조건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 녀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었다.

헵번은 짐을 꾸려 영국으로 건너갔다.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즈음 우연히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캐스팅이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로마의 휴일〉에 출연할 수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데뷔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를 일약 은막의 여왕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공주님의 사랑이라는 동화 같은
주제가 로마를 무대로 펼쳐지면서
숱한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공주 역을 맡았던 <오드리 헵번>과
신문기자 역의 <그레고리 팩>은 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녀 는 소위 '헵번 스타일'이라는
솟커트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 운도 좋았다.
영국 왕실의 유명한 로맨스인 마가렛 공주와
타운젠드 대령의 비련이 이슈가 되고 있을 때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소원의 벽에서의 장면은
지금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작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는 제7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제26회 미국아카데미와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 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언제나 둘이서>,
<백만달러의 사랑>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9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우정 출연으로 등장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영회는 오드리 햄번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제2막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해 그녀는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었다.

우연히 참석한 기금모금 행사에서
자신의 영화배우 경력이 세상 사람에게 관심과
신기함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구나.
영화의 힘이란 정말 놀랍네!"

그녀는 유니세프를 찾아갔다.
유니세프가 그녀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유니세프에 손을 내민 것이다.

헵번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자신이 이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특별기구인
유니세프는 백일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던
오드리 헵번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보수는 1년에 1달러뿐이었고 교통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열정을 다해 헌신했다.

"오드리 헵번이 인기가 떨어지니까 별 쇼를 다하는구만."
"몇 달 저러다가 말겠지"
"자기가 아직도 앤 공주인 줄 아나봐"
언론과 세상사람들은 그녀의 행보를 곱지 않게 보았다.

과거의 은막 스타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곤경과 죽음에 처한
아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길은 아프리카 전 지역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게 이어졌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녀의 끝없는 행보에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에 걸린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각국에서 구호물자와 기부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요?"

1992년 소말리아를 방문했을 때 마을 공터
구석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자루꾸러미를 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원주민에게 웃으며 물었을 때
그녀는 귀를 의심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시체였다.
"오마이갓" 오드리 헵번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았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부터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을 향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을 달라고 호소했다.

* * * * * * *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이 소말리아 방문이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을. 사실
헵번은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되는 것이 두려워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녀는 아랫배에 강한 통증을 느낄 때마다
진통제를 맞으며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오드리 햄번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명망 있는 의사들이 앞 다투어 그녀를
살려보겠다고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암이 워낙 온몸에 널리 퍼져 있어서"  

오드리 헵번은 고개를 떨군
의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한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그 것이 제 숙명인걸요.
그래, 신이 제게 주신 시간이 얼마쯤 남았지요?"  

"한 3개월쯤 남았습니다."
"3개월이라 ...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충분하군요."  

오드리 헵번의 암소식이 알려졌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돕는 거죠?"

오드리 헵번이 대답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그녀는 기족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가 있어. 한번 들어보렴 ."

그녀는 유언처럼 시를 읇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히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이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93년 1월 20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였다.
그날은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던 날이었지만
그녀의 사망 기사가 클린턴 대통령 취임 기사보다 먼저 다루어졌다.

그를 조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티파니 보석가게는 일간지에 광고를 싣고
전 세계의 매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였다.

"오드리 헵번. 1929 ~ 1993. 우리의 영원한 친구. 티파니 사."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 은
장기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를 그냥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



신구약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은 누구이며, 왜 그런가?”


하와가 가장 행복한 여인이고, 그 이유는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신약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은 누구인가?”

성모 마리아이고, 그 이유는 며느리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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