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2/8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1. 2. 12:45

2019년 2월 8일 금요일

[(녹) 연중 제4주간 금요일]



복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4-29

그때에

14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15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16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이 짙은 어둠,

이 혹독한 고통도 모두 지나갑니다!


평생토록 단 한번도 떠나지 않고 묵묵히 고향산천을 지키고 계신 농부 형님이 한분 계십니다.

뵐 때 마다 큰 언덕, 든든한 바위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찾아뵐 때 마다 호탕하고 넉넉한 웃음으로 환대해 주십니다.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없이 한결같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며 겪었던 속상했던 이야기들을 한 보따리, 두 보따리 털어 놓아도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다 들어주시고, 고생많다며, 힘내라며, 등을 두드려주십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약주가 좀 과해져 선을 넘어가는 순간, 주사가 시작되니,

빨리 도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형님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도 그러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해 안달하는 하느님의 실체와 속성을

설득력있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서 13장 8절)

불변성, 영속성, 일관성, 지속성을 지니신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강조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른 우리들, 변화무쌍한 우리들, 불충실한 우리들,

늘 쉼없이 흔들리는 우리들이어서 늘 걱정했는데,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늘 불변하신다니,

늘 항구하시다니, 늘 충실하시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언약, 더 큰 선물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히브리서 13장 5절)

얼마나 마음 든든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당신을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저 슬퍼하시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고 송구스런 얼굴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한 얼굴로 극진히 환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배척하고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등을 돌리지도 않으십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청춘도 지나갑니다.

그토록 기를 쓰고 쌓아올렸던 명예의 탑도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꽉 움켜쥐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아까운 재물들도 손에 쥔 물처럼 싹 다 빠져나갑니다.


다행히도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이 짙은 어둠, 이 혹독한 고통도 지나갑니다.

결국 우리 앞에 남는 것은 상처 투성이인 우리들,

그리고 그런 우리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자비하신 하느님만이 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덤으로 주어지는 사랑

    사랑 안에 머무는 마음은 부드럽고 민감합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것을 기어이 '얻고자' 할 때는 가차없고 모질고 둔감해집니다.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이용할 수 있을 뿐이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네가 필요하다면 나는 너를 이용할 수밖에, 조종할 수밖에, 설득과 방법과 수단을 찾을 수밖에요. 너를 자유롭게 둘 수는 없는 겁니다. 내 삶에서 사람들을 비웠을 때만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일에 내가 죽을 때 나는 바로 사막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두렵고 외롭게 느껴지지만, 한동안 감당할 수 있다면 문득 전혀 외롭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고독, 외로움, 그러고는 그 사막이 꽃을 피우기 시작하고, 마침내 사랑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무엇인지, 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매우 예민한 이해력이 없거나 충분히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처음에는 끈질긴 중독에서 벗어나기가 난감할 수도 있습니다. 고통을 겪는다는 건 훌륭한 일입니다. 그때서야 지겨워질 수 있고, 고통을 이용해서 고통을 끝낼 수 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줄곧 괴로워할 뿐이죠. 이로써 내가 영적 지도자 역할과 심리치료사 역할 사이에서 종종 겪는 갈등이 설명됩니다. 심리치료사는 "고통을 완화해 주자." 영적 지도자는 "괴로워하게 내버려 두어라, 그러면 이런 식의 인간 관계들에 지겨워지고 마침내는 남들에 대한 정서적 의존이라는 이 감옥을 부수고 나오기로 결심하겠지." 진통제를 줄까, 아니면 암을 제거할까? 그걸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어떤 사람이 넌더리가 나서 책을 내동댕이칩니다. 계속 그러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대신 집어올려 주면서 괜찬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영성은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 깨달음입니다. 어머니가 화가 났습니다. "내가 아니고 너에게 잘못이 있어. 그렇지 않다면 내가 화가 나지 않았지." 글쎄요, 난 중대한 발견을 했어요, 어머니. '어머니'가 화가 났다면, '어머니'에게 잘못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는 '어머니'의 화를 다스리시는 게 좋겠죠. 그걸 놓고 거기에 대처하세요. 그건 내것이 아녜요. 내게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어머니의 화하고는 관계없이 살필께요. 난 어머니의 화에 영향을 받지는 않겠어요. 재미있는 건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부정적 감정 없이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나 자신에 대해서도 썩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겁니다. 매우 깨달은 사람만이 죄책과 분노를 꼬집어내기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네 성났군. 안됐네. 난 자넬 구해 주고 싶은 기분이 조금도 없고, 죄책을 느끼기도 거부하네." 내가 행한 무엇 때문에도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리라. 죄책감이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지. 나 자신에게 나쁜 감정을 주면서 '옳았든 글렀든' 내가 행한 것 때문에 나 자신을 채찍질하지는 않으리라. 나는 그것을 분석할, 살펴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면 깨닫지 못해서 그랬던 것이지." 아무도 '깨달음 속에서는' 잘못을 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이 예수는 어떤 잘못도 하실 수 없었다고 매우 아름답게 말해 주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아무런 잘못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깨달은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예수는 자유로웠고, 자유로웠기에 아무 잘못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잘못을 '할 수' 있기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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