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일 주일
[(녹) 연중 제22주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오늘의 묵상
선생님 병
‘리듬’의 저자 김상운씨에게 한 여직원이 파김치가 되어 와서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못 말려요. 제가 하는 일엔 무조건 트집부터 잡으니까요.”
명절에 그녀는 동서들과 의논하여 갈비를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먹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이 별로더라.”
라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맛없는 싸구려 갈비를 사왔냐는 소리입니다.
반찬을 상에 올려놓자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파전을 부쳐놓자 쓱 보더니 “웬 계란을 이렇게 쏟아 부었니? 이게 계란전이지 어디 파전이냐?”
하고 면박하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 중 유독 자신만을 표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시댁이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니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었습니다.
“설마 어머니가 당신만을 차별대우하시겠어? 왜 생각이 그렇게 유치해?”
내 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어머니와 감정이 나빠지니 남편과의 관계도 자꾸 틀어졌습니다.
김상운씨는 그냥 시어머니 장단에 맞장구를 쳐 주라고만 했습니다.
예컨대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은 별로더라.”라고 말하면,
“어머님도 그런 생각이시죠? 혹시나 해서 한 번 사왔는데 다음에는 역시 한우가 낫겠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공격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래... 그럼 한 번 먹어나볼까?”
또는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말하면,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네요. 큰 접시가 낫겠어요.”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럴 것입니다.
“뭐, 일단 담았으니 흘리지 않게 조심히 먹자.”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접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선생님-학생’ 놀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선생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생님인지 가려보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파전에 계란을 많이 넣든 안 넣든 “제가 학생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싸움은 멈추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이게 대세예요.”라고 말했다가는 또 다른 공격을 감당해야합니다.
개가 서로 으르렁 댈 때는 서로 그냥 싸우게 해서 서열을 정해주면 됩니다.
내가 학생이 되려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학생임에도 선생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니 가르치려고만 드는 선생님이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선생님은 왠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서
좋아하게 됩니다.
다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학생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제나 선생님, 혹은 상담사 등과 같이 이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은
이 심각한 ‘선생님 병’에 시달립니다.
강론 시간도 아닌데 계속 가르치고 있는 말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가는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저도 “왜 가르치려고만 들어요?”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외로워질 것인지,
학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남편이 “그러게,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 요즘 어머니가 유독 그러시네?”
라고 말해서 아내에게 사랑받던지,
“당신도 잘못하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러시겠지.”
라고 충고를 주어서 미움을 받던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을 비유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맨 끝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윗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끝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되려고 하면 나중엔 학생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고
학생이 되려고 하면 선생님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두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보다 내가 낫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을 대라고 했더니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과연 몇 명에게서 표를 얻었을까요? 75% 정도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온 마더 데레사도 75% 정도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거의 95%가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마더 데레사보다는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알려주지 말아야하나요?”
당연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직’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언자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지 내 기분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은 해 주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하고
성경에서 해 줄 말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미워해도 감수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언자직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직을 수행해야 할 때는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끝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는 그 겸손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참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가 되는대로 끝자리를 차지합시다.
굳이 한 번 가르치자고 선생님 자리를 탐내다 평생 미움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오늘의 묵상
선생님 병
‘리듬’의 저자 김상운씨에게 한 여직원이 파김치가 되어 와서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못 말려요. 제가 하는 일엔 무조건 트집부터 잡으니까요.”
명절에 그녀는 동서들과 의논하여 갈비를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먹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이 별로더라.”
라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맛없는 싸구려 갈비를 사왔냐는 소리입니다.
반찬을 상에 올려놓자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파전을 부쳐놓자 쓱 보더니 “웬 계란을 이렇게 쏟아 부었니? 이게 계란전이지 어디 파전이냐?”
하고 면박하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 중 유독 자신만을 표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시댁이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니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었습니다.
“설마 어머니가 당신만을 차별대우하시겠어? 왜 생각이 그렇게 유치해?”
내 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어머니와 감정이 나빠지니 남편과의 관계도 자꾸 틀어졌습니다.
김상운씨는 그냥 시어머니 장단에 맞장구를 쳐 주라고만 했습니다.
예컨대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은 별로더라.”라고 말하면,
“어머님도 그런 생각이시죠? 혹시나 해서 한 번 사왔는데 다음에는 역시 한우가 낫겠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공격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래... 그럼 한 번 먹어나볼까?”
또는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말하면,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네요. 큰 접시가 낫겠어요.”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럴 것입니다.
“뭐, 일단 담았으니 흘리지 않게 조심히 먹자.”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접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선생님-학생’ 놀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선생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생님인지 가려보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파전에 계란을 많이 넣든 안 넣든 “제가 학생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싸움은 멈추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이게 대세예요.”라고 말했다가는 또 다른 공격을 감당해야합니다.
개가 서로 으르렁 댈 때는 서로 그냥 싸우게 해서 서열을 정해주면 됩니다.
내가 학생이 되려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학생임에도 선생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니 가르치려고만 드는 선생님이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선생님은 왠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서
좋아하게 됩니다.
다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학생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제나 선생님, 혹은 상담사 등과 같이 이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은
이 심각한 ‘선생님 병’에 시달립니다.
강론 시간도 아닌데 계속 가르치고 있는 말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가는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저도 “왜 가르치려고만 들어요?”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외로워질 것인지,
학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남편이 “그러게,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 요즘 어머니가 유독 그러시네?”
라고 말해서 아내에게 사랑받던지,
“당신도 잘못하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러시겠지.”
라고 충고를 주어서 미움을 받던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을 비유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맨 끝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윗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끝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되려고 하면 나중엔 학생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고
학생이 되려고 하면 선생님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두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보다 내가 낫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을 대라고 했더니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과연 몇 명에게서 표를 얻었을까요? 75% 정도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온 마더 데레사도 75% 정도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거의 95%가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마더 데레사보다는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알려주지 말아야하나요?”
당연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직’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언자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지 내 기분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은 해 주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하고
성경에서 해 줄 말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미워해도 감수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언자직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직을 수행해야 할 때는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끝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는 그 겸손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참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가 되는대로 끝자리를 차지합시다.
굳이 한 번 가르치자고 선생님 자리를 탐내다 평생 미움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선생님 병
‘리듬’의 저자 김상운씨에게 한 여직원이 파김치가 되어 와서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못 말려요. 제가 하는 일엔 무조건 트집부터 잡으니까요.”
명절에 그녀는 동서들과 의논하여 갈비를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먹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이 별로더라.”
라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맛없는 싸구려 갈비를 사왔냐는 소리입니다.
반찬을 상에 올려놓자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파전을 부쳐놓자 쓱 보더니 “웬 계란을 이렇게 쏟아 부었니? 이게 계란전이지 어디 파전이냐?”
하고 면박하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 중 유독 자신만을 표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시댁이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니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었습니다.
“설마 어머니가 당신만을 차별대우하시겠어? 왜 생각이 그렇게 유치해?”
내 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어머니와 감정이 나빠지니 남편과의 관계도 자꾸 틀어졌습니다.
김상운씨는 그냥 시어머니 장단에 맞장구를 쳐 주라고만 했습니다.
예컨대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은 별로더라.”라고 말하면,
“어머님도 그런 생각이시죠? 혹시나 해서 한 번 사왔는데 다음에는 역시 한우가 낫겠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공격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래... 그럼 한 번 먹어나볼까?”
또는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말하면,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네요. 큰 접시가 낫겠어요.”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럴 것입니다.
“뭐, 일단 담았으니 흘리지 않게 조심히 먹자.”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접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선생님-학생’ 놀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선생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생님인지 가려보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파전에 계란을 많이 넣든 안 넣든 “제가 학생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싸움은 멈추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이게 대세예요.”라고 말했다가는 또 다른 공격을 감당해야합니다.
개가 서로 으르렁 댈 때는 서로 그냥 싸우게 해서 서열을 정해주면 됩니다.
내가 학생이 되려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학생임에도 선생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니 가르치려고만 드는 선생님이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선생님은 왠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서
좋아하게 됩니다.
다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학생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제나 선생님, 혹은 상담사 등과 같이 이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은
이 심각한 ‘선생님 병’에 시달립니다.
강론 시간도 아닌데 계속 가르치고 있는 말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가는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저도 “왜 가르치려고만 들어요?”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외로워질 것인지,
학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남편이 “그러게,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 요즘 어머니가 유독 그러시네?”
라고 말해서 아내에게 사랑받던지,
“당신도 잘못하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러시겠지.”
라고 충고를 주어서 미움을 받던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을 비유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맨 끝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윗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끝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되려고 하면 나중엔 학생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고
학생이 되려고 하면 선생님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두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보다 내가 낫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을 대라고 했더니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과연 몇 명에게서 표를 얻었을까요? 75% 정도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온 마더 데레사도 75% 정도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거의 95%가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마더 데레사보다는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알려주지 말아야하나요?”
당연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직’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언자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지 내 기분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은 해 주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하고
성경에서 해 줄 말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미워해도 감수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언자직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직을 수행해야 할 때는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끝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는 그 겸손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참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가 되는대로 끝자리를 차지합시다.
굳이 한 번 가르치자고 선생님 자리를 탐내다 평생 미움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이가 들면 정말 무서운 것이 있다.
|
ㅡ해독의 제왕 무우 ㅡ
미세먼지에 황사에 거기에다 추위까지 시작되면 주변에 감기 몸살을 호소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대부분의 분들이 '병원에 가서 주사 한방'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병원의 주사 한방이 상식이 되어버렸고 우리 조상님들의 슬기로운 지혜는 우리의 기억 저 편으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헌데 그거 아세요?
보다 쉽게.. 보다 덜 아프게..
보다 몸에 더 이롭게..
조상님들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살아오셨다는 거..
어느 집이든 냉장고 안에 무는 있을 겁니다. 설사 없더라도 가까운 마트나 시장에 가면 무엇보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가 바로 무일 것입니다.
무는 천연소화제요, 해독의 명약이오, 감기몸살의 특효약입니다.
이런 말이 있었지요. 한약을 먹고 무를 먹지 말라고.. 한약을 복용하고 무를 먹게 되면 머리가 희어진다느니 약성이 떨어진다는.. 그거 맞는 말입니다.
무는 뛰어난 해독작용이 있어서
독성 뿐 아니라 약성도 중화시켜버립니다. 당연히 약성을 보지 못했으니 쉬 늙을 수밖에요.
무는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고
체내의 독성을 빼주는 명약입니다.
무 속에는 이소티오 시아네이트라는 성분이 매운 맛을 내게 하는데 이 녀석이 몸을 가볍게 하고 신진대사를 촉진시켜줍니다.
무에는 위에 언급한 이소티오 시아네이트, 아밀라제, 비타민C가 풍부하여 위장병에 특효합니다.
위염, 위궤양, 소화불량, 변비에 좋고 해열, 해독하여 감기몸살에 뛰어난 약성을 보입니다.
잎(무청)에는 비타민A, B2, C와 풍부한 식이섬유, 칼슘, 철, 베타카로틴이 풍부하여 온몸의 붓기를 빼주고 성질이 따듯하여 몸이 냉하여 손발이 찬 분들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무를 섭취할 때 식감이 약간 질기다는 이유로 껍질을 깎아내는데요. 껍질에 속보다 두배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껍질의 루틴성분은 혈액순환을 도와 손발냉증이 있는 분들께 좋습니다.
무는 녹차와도 궁합이 아주 잘 맞는데.. 감기몸살이나 급체, 만체, 위염, 위궤양, 과음, 흡연, 만성피로 등이 있을 시에 무 반개를 갈아서 갈은 무만큼의 생수를 붓고 녹차를 티스푼으로 한 스푼 타서 희석시킨 후 냉장고에 넣어두고 증상이 심할 때마다 한컵씩 하루 2~3번 복용하면 좋습니다.
이경우에 3일 이상되면 냄새가 나므로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가급적이면 빨리 복용하는 것이 좋겠지요?
※감기몸살이 심할 때는 무를 갈아내는 것도 귀찮고 매사가 다 귀찮지요. 그럴 때는 무를 약 1.5cm 정도 두툼하게 썰어서 그냥 푹 끓이세요. 그냥 먹기 뭣하면 들기름 조금, 소금으로 적당히 간하여 뜨겁게 수저로 떠서 수시로 드세요.
온몸에 올랐던 열이 내리고 기침을 하며 느끼는 통증이 서서히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흔히 생선찜이나 고깃국에 무를 넣지요? 그것은 생선독(알레르기)이나 고기로 인한 소화부작용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고기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고기를 먹고 체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우리 조상님들은 무의 효능을 일찍부터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를 잘 활용하시며 조상님들의 지혜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겨울철에 얼지 않게 보관하였다가 먹는 무우는 산삼에 버금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변에 흔하게 있는 무우 ㅡ
필요할 때마다 꼭 드세요.
'오늘의 복음과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9/3 복음과 묵상 (0) | 2019.05.06 |
---|---|
9/2 복음과 묵상 (0) | 2019.05.06 |
4/8 복음과 묵상 (0) | 2019.03.11 |
8/28 복음과 묵상 (0) | 2019.03.03 |
8/27 복음과 묵상 (0) | 2019.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