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5/13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2. 19. 20:40

2019년 5월 13일 월요일

[(백)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1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관계의 탐험정신을 잃지 말라


영국이 아프리카를 탐험할 때 일입니다.

당시 두 영국인의 행동이 크게 대비된 바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황금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엄청난 금과 다이아몬드를 영국에 들여왔습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영국을 진정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영웅으로 칭송받았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침략정책과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영국인들로부터 반역자요 배신자로 비난받았습니다.

전자는 로드(Cecil Rhodes),

후자는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입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로드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영국 국립묘지에 안장돼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왜 전혀 다른 평가를 받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의 차이 때문입니다.

즉 리빙스턴은 하느님(God)을 믿었고 로드는 황금(Gold)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내가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어떤 문을 통과하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모든 문 뒤엔 또한 각자의 세상이 펼쳐져있습니다.

믿음은 사람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믿느냐에 따라

각자가 만나게 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사람은 나의 문이 되고 그 문을 통해

그 사람이 초대하는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각자는 각자가 행복이라고 믿는 문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각자의 결말을 맞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문’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 푸른 풀밭이 있고 생명이 흘러넘칩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도 문입니다.

각자가 믿는 대로 각자의 세상을 만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은 내가 창조한 세상 안에서 살게 됩니다.


내가 창조한 세상이 천국이라면 나를 믿는 사람들은 나와 만날 때 천국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지옥이라면 나를 믿는 사람들은 나와 만나서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학교에서 이것을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누군가를 믿는 것이 커다란 모험인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 등 뒤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두려워하며

사람을 거부하고 피하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이 친밀한 관계를 저해하는 요소입니다.

맞아들이고 그 사람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셔서 지옥까지도 들어가셨습니다.

혹시 당신 세상으로 건너올 이가 없나 해서 죽음의 세상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의 세상 안으로 건너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에 묶여서 타인과의 교류를 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세상이 제일 좋다고 말합니다.

지옥에서 살면서도 말입니다.


그들은 더 좋은 세상을 맛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인줄 압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어야하고 그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도 거부하게 됩니다.

시도해보고 아니면 다시 나오면 됩니다.

아무도 붙잡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내면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주일에 쉬며 기도해도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원수가 잘 되도록 기도해 주어도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오른 뺨을 맞았을 때 왼 뺨을 내어주어도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꾸어 달라는 사람에게 꾸어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주어도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세상이 이런 세상입니다.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 중 하나도 시도해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천국이라 믿기 때문에 다른 세상을 탐험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럴 용기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살게 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다 자신들이 태어나 자란 세상이 전부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보는 세상은 그냥 불빛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고 진실이 아니며 허상입니다.


한 사람이 그 곳에서 풀려나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그는 찬란한 참 세상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빨리 뛰어 들어가 동굴에 사는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그러나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바보 취급하는 그 사람을 잡아서 죽입니다.

그냥 확인이라도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겁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세상에 갇혀 영원히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조금씩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세상을 탐험할 용기를 냅시다.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아니면 그냥 나오면 됩니다.

실패의 경험도 성장의 기회입니다.

다만 탐험가 정신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믿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물 위로 뛰어내릴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분명 탐험가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스페인 - 성가족 성당 (Sagrada Familia)

 

 

 

 

Sagrada Familia 사그라다 파밀리아 우리 말로 성가족 성당입니다 

 

 

 

  

 

 

 

 

<가우디의 생애(1852~1926)>
1852년 6월, 스페인 남부 카탈루냐의 레우스에서 태어난 가우디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친한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홀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그는 항상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고 하는데,

자연을 테마로 한 아름다운 그의 건축물은 아마도 이 시절의 영향인 듯하다.

17세부터 건축을 공부하면서 바르셀로나에서 건축학교를 졸업한 뒤

이곳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해나간다.

어렸을 때무터 류마티즘 때문에 거동이 불편했던 가우디는

그의 학창시절 동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그를 두고 가우디의 스승은

“나는 정신병자 아니면 천재를 발굴한 것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는데,

선천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수시로 들판과 숲으로 뛰어나갔던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는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현대의 건축가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파격적인 건물들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에스파냐의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Antonio Gaudi y Cornet)가 설계하고,

직접 건축감독을 맡았다

건축물로 입체기하학에 바탕을 둔 네오고딕양식의 성당입니다

1882년 처음 공사를 시작해 1926년 6월 죽을 까지 교회의 일부만 완성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현재까지도 계속 작업 중에 있고 13년후 완공 된다 합니다

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쪽으로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완성된 피사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하네요

 

 

 

 

 

 

 

 네오 고딕 양식 으로 지어진 약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대성당으로

스페인 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Antonio Gaudi)  

 

 

 

 

 


 

 

 

 

 

 

 

 

 

 

 

 

 

 

 

 

 

 

 

 

 

 

 

 

 

 

 

 

 

 

 

 

 

 

 

 

 

 

 

 

 

 

 

 

 

 

 

 

 

 

 

 

 

 

 

 

 

 

 

 

 

 

 

 

 

 

 

 

 

 

 

 

 

 

 

 

 

 

 

 

 

 

 

 

 

 

 

 

 

네오고딕풍의 양식 화려한 스테인드그라스

곡선과 기하학적인 입체적 선들

직선은 인간의선이고 곡선은 신의선이다 라고 가우디는 말했다합니다

 

 

 

 

 

 

 

 

 

 

 

 

 

 

 

 

 

 

 

 

 

 

 

 

 

 

 

 

 

 

 

 

 

 

 

 

 

 

 

 

 

 

 

 

 

 

 

 

 

 

 

 

 

 

 

 

 

 

 

 

 

 

 

 

 

 

 

 

 

 

 

 

 

 

 

 

 

 

 

 

 

 

 

 

 

 

 

 

 

 

 

 

 

 

 

 

 

 

 

 

 

 

 

 

 

 

 

 

 

 

 

 

 

 

 

 

 

 

 

 

 

 

 

 

 

 

 

 

 

 

 성당 기둥에 붙어있는 타원형의 구슬은 나뭇가지에 부러진 자국을 표현한 것이라한다

성가족 성당은 Sagrada Familia 는 모두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표현한 것이라한다

 

 

 

 

 

 

 

 

 

 

 

 

 

 

 

 

 

 

 

 

성가족 구조 성당은 크게 3개의 파사드로 이루워졌 있는데

가우디가 죽을 때까지 완성된 파사드는

위 사진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축하는 파사드다

이 파사드는 가우디가 직접 감독하고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머지 두개의 파사드는 수난과영광의 파사드 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나라 글씨도 보이지요.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을 짓다가

   1926년 길을 건너다 트램에 치여 쓰러지자 사람들은

가우디를 걸인이라고 생각해 도와주기를 꺼려했고

결국 뒤늦게 빈민가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틀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행색이 남루해 또 다시 이동하게 됐다.

다시 실려간  병원은  기부한  병원이었다

그 병원에서도 안토니오 가우디을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손도 한 번 못 써보고,

세상 사람들은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지 3일 만에 그의 죽음을 알게되어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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