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7일 주일
[(자) 사순 제5주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
그때에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신경>
![]()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럽혀질 수 있는가?
파락호(破落戶)란 단어는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의성金씨 가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지나치게 즐겼습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쳤습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도 다 팔아 먹었습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습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동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출처: ‘예화1302, 누명쓴 애국자들’, 작성자 cyjung0103)
남을 돕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난해지며 남을 돕는다면 이는 더 높은 경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에 지장보살이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덮어쓰면서까지 타인을 구제하려는 경지가 아마도 사랑의 최종점일 것입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옥에 가도 자신은 보살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최대한 남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 타인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제가 먼저 서먹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이미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누구와도 편하게 대하기 위해 뒤에서 남의 말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부작용이 큽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조해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데 혼자만 가만있으면
왠지 그 험담하는 사람 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동조해 주어야합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 무리에서 환영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버티면 그 무리 전체가 정화될 확률도 있습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온 아는 형님이 그랬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다 그 형님에게 술을 먹이고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러기는 싫었는지 친구들에게 완강히 저항했다고 합니다.
옷도 찢기고 허리띠도 끊어졌고 안경은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다 함께 술을 한 잔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세상은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이 세상에서 외톨이 되는 십자가를 감수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나무라지 않기 위해 세상과 적이 되셨습니다.
당신 손에 흙을 묻히셨습니다.
세상에서 그 여인 대신 당신이 더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인에게 던지려던 돌을 놓고 돌아갔지만
결국 그 방향을 예수님께 틀었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 여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타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그래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가 변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면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까봐
타인의 잘못까지 뒤집어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해서 누군가를 정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피 흘림입니다.
누군가를 닦아주면 그 닦아준 것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이를 감수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어야지 자신이 더 더러운 사람이라면
깨끗하게 해 준다고 하면서 더 더럽히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남의 죄를 묻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겐 세상의 때가 묻습니다.
그러나 마치 보석에 묻은 흙처럼 그 때는 닦으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흘리셔야 했던
예수님의 피 흘림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녀를 씻어주지 않는 어머니가 없듯,
이웃을 씻어주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도 없습니다.
판단할 것이 많아도, 내가 더러워져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신 혼자 깨끗하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조용하게 바닥에 글을 쓰며 자신이 더럽혀지면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깨끗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십자가는 타인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석은 자신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흙이 묻어도 보석은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석이 아니고 약해서 세상 것과 섞이면 내 자신까지 더럽혀질까봐
자신을 보호하느라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동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보석임을 알 때 세상의 묻은 때를 벗겨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죄를 짊어져도 상관이 없으려면 얼마나 완벽해야 할까요?
그렇게 완벽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줄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 더러워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닦아주려면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여야 합니다.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임을 알려면 내가 보석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을 이것을 믿도록 당신 보석을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셨습니다.
내가 보석임을 알 때 남의 때가 묻는 것을 견뎌낼 수 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이 들려주듯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 앞에 곤혹스럽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몸을
왜 나이 많은 자들이 먼저 떠났을까요?
그 여자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제목을 클릭해 보시고
또 도표 아래 화살표를 클릭해 보세요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오늘의 복음과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0 복음과 묵상 (0) | 2019.01.24 |
---|---|
4/9 복음과 묵상 (0) | 2019.01.24 |
4/6 복음과 묵상 (0) | 2019.01.24 |
4/5 복음과 묵상 (0) | 2019.01.24 |
4/4 복음과 묵상 (0) | 2019.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