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4일 주일
[(녹) 연중 제7주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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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정의 변증법
마이크 매킨타이어란 이름의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타호 시에서
출발하여 뉴올리언즈로 차를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쯤 지나는데 한 젊은이가 도로 옆에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차가 어디쯤에서 휘발유가 떨어졌는지 한 손에는 휘발유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휘발유통으로 운전자들의 동정을 사서 차를 세우게 하려는 속임수인지 몰라
그냥 지나쳤습니다.
전에 그런 식으로 차를 세워서 목에 칼을 들이대고 금품을 빼앗아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을 들어서 더욱 세워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서도 사막 한가운데 서 있던 그 청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액셀 페달을 밟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흉흉하게 변해버린 세상과 함께 자신도 그렇게 모르는 사람에게는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이크는 진정 이 세상이 그렇게 도처에 강탈범들이 즐비한 세상인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횡단 무전여행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돈은 아얘 처음부터 지니지도 않고, 중도에 누가 주어도 받지도 않고,
그저 종이에 행선지를 ‘미국’이라고만 쓰고 매일 만나는 낯선 사람들에 의해 먹고, 자고,
차를 타며 미국을 횡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렇게 미국을 횡단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는 낯선 사람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그러면서도 친절을 베푸는 많은 사람을 항상 만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는 길이면서도 자신보다는 길거리에 서 있는 이 사람을 위해 희생했던
나이든 여성도 만났고,
비가 퍼부을 때 예전에 강도에게 돈을 빼앗겼던 경험이 있으면서도
비 맞고 길에 서 있는 이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또 한 번 속는 셈치고 도와준 트럭운전사,
이 사람에게 야영장소를 찾아주기 위해 저녁나절 한 시간이 넘게 차를 몰고 다녔던 중년 부부,
가난하지만 자신이 가진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나누어 주던 수많은 사람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식사를 대접했던 사람들까지 수없이 많은 사랑에
그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01가지,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
본래 마이크 매킨타이어란 인물은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세상 사람들을 모두 믿었다가는 커다란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이론과 경험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을 횡단하면서 그래도 세상은 믿을만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결국 본래 어린아이 때의 마음으로 돌아온 것이기는 하지만
중간에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했다가 다시 친절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런 것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그 어려운 단어, ‘변증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원리로서 처음엔 이견이 없다가 나중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생기고
그 다음엔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통합되어 새로운 하나의 원리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변증법은 본래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으로써,
참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오류를 지닌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 진리가 참다운 진리임을 밝히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존재론적인 변증법으로 발전시켰고,
막스가 유물론적 변증법을 주장하여 계급간의 변증법적 갈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사회로 발전해간다는 역사적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저는 매우 복잡해 보이는 이 원리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변증법의 기초, 즉
‘정(正)=> 반(反) => 합(合)’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엄마의 태아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이 잉태됩니다.
이것이 ‘정(正)’입니다. 그러나 반대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한 몸’인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면 자신이 어떻게 참다운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교회의 진리도 수많은 이단들과 맞서며 그 정체성을 찾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가 지나면 ‘남-녀’의 구별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테스토스테론’이란 호르몬이 분비되는 태아는 남성의 몸을 지니게 되고
그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은 태아는 그냥 여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사람이 만들어진 두 달 후부터만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서로 구별되며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서로 반대됨을 알아차리게 되는 ‘반(反)’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남자와 여자가 합(合)해지게 되는 때가 있는데,
이는 태아에서 서로 구별이 없을 때의 하나인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합(合)은 서로의 차이를 아는 것이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이 합일은 더 큰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에너지를 통해 새로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핵융합에서 나오는 에너지도 이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세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처음에 이스라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파라오의 집에서 자랍니다.
이는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정’의 단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집트로부터, 또 이스라엘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함을 알고 살에 이집트를 탈출하여
또 몇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을 키워준 파라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까지 모세에게는 하나가 될 수 없는 상대인 것입니다.
이런 년간의 ‘반’의 과정을 넘어서도록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악인 파라오에서 선인 이스라엘을 구해오라고 그를 파견하십니다.
물론 그는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반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별할 줄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악은 버리고 선과 하나가 되게 됩니다.
예수님도 모세처럼 우리에게서 악을 몰아내고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생명력으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을 악을 떨쳐내고 그리스도와 성체성혈을 통해
새로 태어나 그분과 한 몸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올 피해가 두렵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아직은 ‘정’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 태어났는데 그 정권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를 따져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그 안에 머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유아기에 머물렀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원수’처럼 미워진다는 것은 이미 ‘반’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되고 ‘합일’하는 단계까지 가야만 온전한 완성과 에너지와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작정 감싸 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 안으면 내 마음이 그 가시에 찔림을 아주 잘 알면서도
감싸 안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완전해 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정원 씨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가 유영철임을 명확히 알았고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합일의 과정을 힘겹게 이루어 냈습니다.
그리고 유영철을 자신의 양자로 삼음으로써 이 세상에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조차도 이 세상이 좋아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겼다는 말은 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을 당신 품에 품기 위해서 싸우셨던 것입니다.
모든 싸움이 결국 이 ‘합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라가 로마의 압제에 있고 카이사르가 이스라엘의 적이고 원수임을 알지만
그래도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하시며 그에게 세금을 낼 것을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은 ‘합’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것입니다.
저는 성당에서나 가정 내에서 정치 이야기로 서로 갈라지는 것을 많이 봅니다.
누구는 좌파, 누구는 우파, 또 누구는 진보, 누구는 보수, 또 누구는 경상도, 누구는 전라도,
또 심지어는 젊은 사람들과 나이든 사람들과도 나뉘는 모습입니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서 대화하다가 서로 상대가 자신과는 반대되는 입장임을 알고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 신부님이 강론하실 때 그냥 일어나 나가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 즉
‘서로 반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생각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너무도 서로 갈라져 있기만 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고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우리나라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갈라지게 만들려는 세력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혈연, 지연, 옳고 그름의 차이 등을 극복하고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 완전해 지는 길임을 깊이 인식할 때에야
통일도 앞당겨 질 것입니다.
우리끼리도 하나가 되지 못하는데 통일을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먼데 있는 대단한 이론이 아닙니다.
바로 그래야만 온전해 질 수 있음을 깊이 깨닫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품어 안으려고 노력할 때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할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인생의 가시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몸부림 칠수록 가시는 더 아프게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가시는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모나 육체적인 장애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환경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원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가시 때문에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삶을 혐오하게 되기도 합니다.
로트렉이라는 화가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차례로 다쳤습니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다리가 자유롭지 못했고
다리 한쪽이 좀 짧았다고 합니다.
다리 때문에 비관한 그는 방탕한 생활 끝에
결국 창녀촌에서 불우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 그렸던 그림들은
아직까지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내 다리 한쪽이 짧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한적이 있습니다.그에게 있어서 가시는 바로 남들보다 약간 짧은 다리 한쪽이었던 것입니다.로트렉의 그림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 고통받아온 것이 오히려 존재를 들어올리는
힘이 되곤 하는 것을 겪곤 합니다.그러니 가시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뺄 수 없는 삶의 가시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스려 나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잔을
얼마나 쉽게 마셔 버렸을 것인가,
인생의 소중함과 고통의 깊이를
채 알기도 전에 얼마나 웃자라 버렸을 것인가.
실제로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
그 날카로운 가시야말로 그를 참으로
겸허하게 만들어줄 선물일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뽑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시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 "빈통의 물"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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