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7일 주일
[(녹) 연중 제6주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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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도록 사랑하면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든 소녀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비를 구해 주었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긁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와
자기를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망설임 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주세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는 알았다며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 사라졌습니다.
그 후 소녀에겐 일평생 늘 행복이 떠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할머니가 죽기 전에, 그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나비천사가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와 내 귀에 대고
‘나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지금 나를 구해 준 것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면 꼭 도와주세요.
그럴 때마다 행복 에너지를 많이 보내드릴게요.’
라고 속삭이고 떠나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행복해지고 싶었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주기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꽃은 꽃을 피우기 위해 존재합니다.
꽃은 아름다움을 풍기고 꿀을 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사람 또한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때 태어난 소명을 다 하게 되는 것이고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가난해지셨겠습니까?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굶주린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 굶주리셨겠습니까?
배고픈 자녀들을 보시며 당신만 배불리 어찌 드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또 왜 우셨겠습니까?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당신 자녀들을 보며 어찌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왜 미움을 당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있다.”(마더 데레사)
그렇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에 나에게 남는 것은 가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멸시뿐일 수 있습니다.
성모님도 당신이 가지신 전부인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속죄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 때 예언자 시메온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당신의 전부를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모님은 아낌없이 봉헌하십니다.
스펀지는 그 안에 스며든 물을 최대한 많이 짜낼수록 더 많은 새로운 물을 흡수합니다.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많이 남을 행복하게 할수록 더 새로운 행복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영광스러운 승천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비워내지 않으면 어떻게 채워줄 수 있겠습니까?
아프도록 사랑하면 아픔은 없고 더 큰 사랑만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각 못한 사실
- 지식과 깨달음, 정보와 깨달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방금 말했거니와,
- 깨달음 상태에서는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 그러나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서, 나쁜 일인 걸 '알면서'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 나라면 이 말씀을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옵니다"로 옮기겠습니다.
- 바울로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했다고 덧붙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했을 리가 없죠.
- "여러분을 죽이는 자들이 모두 (그런 일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할' 때가 옵니다."
-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정보와 지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 "죄를 지을 때마다 사람들은 선을 가장하여 죄를 짓고 있다."
- 사람들은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 나쁜 줄 아는 것마저 좋게 보고 있습니다. 선을 핑계삼아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분이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렵더라는 두 가지 상황을 이야기해 주더군요.
- 그녀는 서비스 업체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여러 대의 전화가 계속 울려 대는 데서 혼자 일하고 있었습니다.
- 초조하고 화난 사람들이 하도 많아 심란해져서 평온과 고요를 유지하기가 몹시 힘들더라는 겁니다.
또 다른 상황은 경적을 울리면서 차량들이 붐비는 속에서 차를 몰고 있는데 사람들이 욕설을 질러 대는 경우라고 했습니다.
- 그런 때에도 결국은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고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 여기서 집착을 찾아내셨나요? 평화. 평화와 고요에 대한 집착.
- "평화롭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긴장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을 겪어 보셨나요?
- 깨치기 전에는 우울하곤 하더니, 깨친 후에도 계속 우울하구나. 긴장 해소와 민감성을 목표로 삼지 말 일입니다.
- 긴장을 풀려고 긴장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셨나요?
- 긴장되면 단순히 긴장을 관찰할 일입니다.
-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 변화시키려고 애를 쓸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되죠. 요구되는 건 깨닫는 겁니다.
울려 대는 전화를, 곤두서는 신경을, 자동차 안에서 핸들을 돌리는 운전을 그대로 느끼십시오.
- 달리 말해서, '현실'에 도달하고 긴장이나 고요는 그대로 내버려 두십시오.
- 사실은, 현실과 접촉하기에 미리 너무 골몰해 있겠기에 그것들을 내버려 두어야겠다는 겁니다.
- 차근차근 나아가야죠.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버려 두십시오.
- 진짜 변화는 올 때가 되면 오겠죠. "에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의해서 이루어지겠죠.
- 깨달음이 현실을 풀어놓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깨달음으로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것은 체험해야 할 일입니다.
- 이 점에서 여러분은 단지 나의 말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 아마 깨닫기 위한 설계도 있겠죠.
- 여러분의 "에고"가 교활한 방법으로 여러분을 깨달음 속으로 밀어넣으려 하겠죠.
- 주시하십시오! 저항에 부딪힐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 깨달음에 늘 마음쓰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가벼운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깨어나고 싶어하고 정말 깨어났는지 알아내고 싶어하죠.
- 그것은 '수행'에 속하는 것이지 깨달음은 아닙니다.
- 우리가 목표를 성취하도록, 어딘가에 도달하도록 훈련받은 문화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되겠지만, 실상 여러분은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에 갈 곳이란 없습니다.
- 일본 사람들의 멋진 표현이 있죠. "가다가 멈추는 날 이미 당도해 있으리라."
- 이런 자세라야 합니다. "나는 깨닫고 싶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상대하고 일어나는 그대로 두고 싶다.
- 내가 깨어난다면, 좋지. 잠들어 있으면, 좋지." 목표로 삼아 '얻고자' 하는 순간, "에고"의 영예, "에고"의 진취를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 '이루었다'는 흐뭇함을 원하는 겁니다.
- 정작 "이루었을" 때는 모르는 법입니다.
-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모르는 법입니다.
- "주님, 저희가 언제 이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 자비를 베푼다는 의식을 잃었을 때만큼 자비가 아름다운 때는 없습니다.
- "도와 드렸다고요? 내가 좋아서 한 일인 걸요.
- 그저 내 춤을 추고 있었죠. 도움을 받으셨다니 거 참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내 공덕은 아녜요."
득달할 때는, 깨달을 때는 점점 "깨어났다"니 "잠들어 있다"니 하는 딱지에는 마음쓰지 않게 됩니다.
- 지금 여기서 나의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는 여러분의 영적 탐욕이 아닌 여러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입니다.
- 깨어납시다.
- 참 좋을 것입니다.
- 얼마 후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 살고 있기 때문에 깨달아 있는 겁니다.
- 깨닫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 그리고 삶 자체를 돌보느라 고통만 남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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