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2020년 1월 19일 주일

메옹 2019. 10. 26. 15:23

2020년 1월 19일 주일

[(녹) 연중 제2주일]

복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오늘의 묵상


성령은 하느님의 피다

스웨덴 한 시골마을에도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싣고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커브가 5개나 남았다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운전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커브를 틀었고 이제 곧 오르막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길 한 가운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경적을 울렸고 아이들은 재빨리 길가로 피했습니다.

한 아이만이 신발이 벗겨진 채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아이를 피하던지 절벽으로 차를 몰아붙이던지 결정을 내려야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기로 결심을 하였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비탈에 차를 세워둔 버스 기사는 황급히 뛰어내려 아이에게로 달려가서 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운전기사를 탓했습니다.

운전 실력도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이라며 심지어는 고발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버스 기사는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버스에 함께 탔던 한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다 죽는 편이 낫습니까?

저 운전기사는 우리 대신 자신의 아들의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제야 운전기사가 아이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며 흐느끼는지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아빠가 미안하다! 흑흑!”

누구도 더 이상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도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세례는 물로 씻는 정결례가 발전한 형태라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없애는 것이 세례입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을 소개시켜 줍니다.

요한의 세례는 참 세례를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볼 수 있게 하는 씻음인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하느님의 어린양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을 받은 분이셔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이든 받은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주라고 요한을 보내신 분께서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씻겨야 하는 인간의 죄는 무엇일까요?

새로 태어나기 위해 벗어버려야 하는 인간의 옛 본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사랑을 받고 부모를 알게 되면 기어 다니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고

걷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만약 두 발로 걷게 된다면 옛 본성에서 깨끗해진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부모의 희생이 아이에게 믿음을 주어 옛 본성을 정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은 본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본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인간의 본성을 벗겨버리는 힘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느님의 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천민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민은 사무라이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성을 짓는 성주에게 가서 자신이 그 기둥에 들어갈 테니

자신의 아들을 사무라이 교육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넣고 지으면 그 성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는 그 성에서 사무라이 교육을 받았고 귀족 아이들의 괴롭힘에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어머니가 들어가 계신 기둥을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나오는 그 피는 도망치고 싶은 그 아이의 자아를 죽여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무라이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전 본성을 죽일 수 있는 힘은 ‘피’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의 본성을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바다를 왜 ‘홍해’, 즉 ‘붉은 바다’라고 하였을까요?

옛 본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하고” 그 물에 세례를 받는 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0항)고 가르칩니다.


누구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이루어진 그 붉은 바다를 건너면

옛 본성이 그 피 속에 수장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깨끗이 빤 정결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묵시 7,14 참조).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냥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라고도 말합니다(1코린 12,13 참조).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작용으로 교회 안에서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981항)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피가 곧 성령이고 그 성령으로 인간의 옛 본성인 죄가 씻기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 성령으로 죄가 사해집니다.

그 성령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임을 안다면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 할 때마다 자신의 자녀의 팔을 하나씩 잘라야 한다면 죄를 지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사함의 값이 그리스도의 목숨 값임을 믿어야합니다.

그래야만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어야만 그 효과를 발휘하듯

성령도 그리스도의 피임을 믿어야만 우리가 정화됩니다.


기도를 통해 오시는 성령의 은총이 하느님의 피 흘리심임을 믿으며 “아멘!”합시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로 모아집니다(1요한 5,8 참조).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아하고 기품 있게 늙어가는 5가지 방법
 
대문호 괴테는 80살이 넘어서 피를 토하는 큰 병에 걸렸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위독했지만, 당시 대작

 <파우스트>를 마무리하고 있던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세상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아 물러가라!'라고." 
 
강력한 의자로 병을 이겨낸 그는, 무사히 <파우스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은 평생 활력이 넘쳤다.
수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그 자신도 만족한 삶을 살았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당당한 풍체였고,
한 마디로 압도적인 인상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신속하고 단호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마치 청년과도 같았다.
괴테의 풍모가 느껴지는가? 
세상에 수많은 위대한 작품과 사랑을 남긴
그의 삶은, 누구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넘쳤다. 
 
마흔이 넘으면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추하게 늙고 싶진 않다."
하지만 현실은 바람과 다르다.
마흔이 넘고 쉰이 지나 예순이 될수록 외로워지고,
자기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에 괴테는 노인의 삶을 '상실'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건강과 돈, 일, 친구 그리고 꿈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우아하고 기품 있게 살 수 있는
5가지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 건강한 육체
어떤 명예와 지위로도 병을 이길 순 없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그간 어렵게 관리한 재산과 삶의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건강은 건강할 때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안타깝게도 세월이 지난 후에야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아프면 모든 게 끝이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건강을 챙겨야 나중에 원하는 것을 누리며 살 수 있다. 
 
2. 돈
건강이 가장 중요하지만, 몸은 건강한데 쓸 돈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그것만큼 사람을 외롭게 하는 상황도 없다.
죽는 날까지 꾸준하게 돈을 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힘들어도 나중을 위해 모아둬야 한다. 동시에 꾸준하게 수입이 생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게다가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제는 돈을 벌 때가 아니라 돈을 쓸 때라는 신호다.
'쓸 돈이 있어야지!'라고 대답하는 돈 없는 노년은,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서러운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
주머니에 돈이 있지만 쓰지 않고 절약하는 것과 돈이 없어서 쓰지 못하는 것은
 상황은 같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전혀 다르다. 돈 앞에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3. 일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몇 살부터 노인이 되었는가?" 
중요한 건 일이다. 그리고 노년의 기간은 절대 짧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예상보다 긴 노년의 시간이 다가올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찾아내서 시도해보자. 일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준다. 할 수 있는 힘과 의지는 뜨거운데,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그것만큼 괴로운 상황도 없다.
죽을 때까지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사랑'과 '일'뿐이다. 
 
4. 친구
버스에서 한 노인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을 봤다.
다섯 명 이상의 지인에게 통화를 시도했지만 통화시간은 30초를 넘지 못했다.
 그러다 1분이 넘게 지속되는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노인의 목소리는 소년과도 같았다.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투명했고,
행복함이 느껴졌다. 노년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과 소외감이다.
 노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좋은 친구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또한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시간과 정성, 그리고 관심과 때로는 돈도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가가자. 
 
5. 꿈
노인의 꿈은 삶을 향한 소망이다. 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생활과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나를 만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나를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길이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다.
 방향을 모르고 걷는 사막에서는 아무리 열정적으로 뛰어도 마음만
 지칠 뿐 남는 게 없다. 그래서 많은 노인이 공부를 시작하는데,
 사실 길이 없는 공부는 그냥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공허하다.
중독과 다를 게 없다. 할 게 없어서 공부하는 사람의 뒷모습은 외롭다.
 내면을 바라보며 길을 찾고, 꿈을 향해 걷자. 
 
늙어간다는 건, 누군가에겐 서러운 일이고,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남이 보기에 아름답게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느끼기에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괴테는 '경고'라는 시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디까지 방황하며 멀리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것은 여기 가까이 있다.
행복을 잡는 법을 배워라.
행복은 언제나 네 곁에 있다." 
 
기억하라,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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