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3일 금요일
[(백) 한가위]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5-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
탐욕의 끝
남미를 여행할 때 잉카인들의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금이 많아서 짐승까지도 금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치장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금은 단지 몸을 치장하는 금속일 뿐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은 해님의 땀, 은은 달님의 눈물로 불렸습니다.
그들에겐 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든 가치는 노동력으로 측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532년 피사로라는 사람이 엘도라도의 전설을 찾아 잉카를 찾았습니다.
엘도라도는 금으로 치장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금이 가득 찬 연못일 수도 있고 금으로 된 산일 수도 있습니다.
까하마르까 전투를 거친 후, 안데스 산맥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현재까지 채굴된 은은
62,000톤입니다.
당시 잉카인들은 왜 유럽인들이 금과 은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겐 금과 은은 휴대할 수 있는 권력이며 가치의 저장소이고
계산의 단위였습니다.
스페인사람들은 강제 노동제를 적용하였는데, 포토시에 들어간 사람 8명 중 1명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약탈당한 잉카인들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금과 은을 들여온 스페인은 더 부유해졌을까요?
그 당시는 스페인 경제가 살아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경제는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은을 많이 들여오면서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반면
물가는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이내 은화는 쓰레기처럼 취급되게 되었고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해졌습니다.
탐욕은 타인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국엔 자신까지 죽입니다.
어떤 탐욕스런 논의 주인이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자신만 받아쓰고
밑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논으로부터 물을 받아야 했던 논들의 벼는 약해져서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쌀값이 오를 것을 기뻐하던 탐욕스런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밑에서 시작된 병충해가 자신의 벼까지 모두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더 가지면 그만큼 타인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탐욕은 결국 자신까지 죽이게 되어있는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데 무슨 폭력이니 죄이니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고 나는 부지런하고 그들은 흥청망청 쓰고 나는 절약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마존 부족이나 혹은 북한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의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부자인 것 자체가 어쩌면 폭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부자일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재화가 돌아가게 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나누어야 하는 의무까지 함께 주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내어주는 호수입니다.
자신도 생명으로 가득 찼고 주위도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반면 갈릴래아로부터 물을 받아들이는 사해는 그 반대입니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자신도 죽였고 물을 쪽쪽 빨아들이기 때문에 주위도 황량한 소금사막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많은 돈을 쌓아놓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받아들인 물을 강물을 통해 내어보내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혼자서 살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지나치게 탐욕을 내어 쌓아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안에서 부자가 창고를 늘리는 바로 그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쌓아놓는 이유는 내일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에 내일도 당연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총량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 것은 믿을 수 없고, 세상 것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믿는 것과 한 운명을 맞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영원할 수 없습니다.
가라앉는 배를 꼭 쥐고 있으면 그 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합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이 채워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밭에 밀알 하나가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내가 나누는 것은 수십 배의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마을의 최 부자 가문은 오랜 세월을 부자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훈이 ‘돈은 똥이다’라는 이유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썩어서 나에게 해를 입히지만 나누면 거름이 되어
더 많은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나누는 사람을 굶게 만드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라고 합니다.
참나무는 잎도 약으로 쓰이고 나무는 단단하여 목재로 쓰입니다.
그리고 오래 타서 불을 때기에도 좋고 숯은 참숯을 알아줍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면 사람들이 더 많이 베어서 멸종이 되어야할 텐데
어떤 나무보다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어놓는데 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더 많은 도토리를 맺는 참나무는
음식이 부족할 때 동물들에게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합니다.
동물들은 그것들을 나르다가 놓치기도 하고 다람쥐는 자신이 파묻어놓은 도토리들을
많이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땅에서 자라나 나무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어주면 더 많이 받게 되어있는 것은 하늘의 이치고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웃들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막아버리면 하느님께도 이웃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죽듯이 모든 것도 나에게 들어와 다시 나가지 않으면
썩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한가위, 우리 모두가 풍요롭게 되는 길은 바로 나눔뿐입니다.
풍요를 위해 가두어 놓은 것을 열어 세상을 비옥하게 합시다.
어떤 부자 가문은 돈을 똥으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머물러 있으면 내 안에서 썩어버리지만 밖에 뿌려지면
곡식이 많이 달려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고령자, 단백질 30% 더 필요…
많이 먹기보다 '생물가' 높은 식품 드세요
100세 시대, 노쇠는 病이다] [6] '근육 연금술사' 단백질
달걀·우유·쇠고기 順 생물가 높아 덜 먹어도 잘 흡수, 콩팥 부담 감소
◇ 부적절한 영양 섭취가 노쇠 주요 요인
국내 65~74세 인구의 56%와 75세 이상 인구의 71%는 에너지를 필요량보다

◇ 고령자는 단백질 30% 더 섭취해야
단백질은 검정콩, 닭·소·돼지고기, 생선, 달걀 등에 많다.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긴 하지만 지나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
◇ 단백질 소화·흡수력 높이는 조리법
고령자는 씹는 능력과 소화, 흡수력이 약하기 때문에 단백질 소화, 흡수를 원활하게
예를 들면, 콩은 소금물에 담가서 불린 후에 삶으면 단백질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
단백질 활성을 돕는 영양소도 알아두면 좋다.
공동 기획: 한국임상영양학회·대한노인병학회
어느 의대 교수의 ‘죽음학’ 강의
정현재 서울대의대 내과학 교수
(소화기학) 교수는 10년 넘게 ‘죽음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위염이나 위궤양을 유발하는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연구의 권위자로 대한소화기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부모와 친척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죽음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수많은 과학적 연구 성과를 접한 결과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저서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비아북)에서 근사체험, 죽음 뒤의
세계 등을 발췌해 싣는다.
죽은 다음 어떻게 되나 의문 갖고 15년 전 죽음 공부 육체는 분해돼 자연으로,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 근사체험 알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불안·공포 크게 줄어
나는 쉰 살 무렵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죽음과 관련이 있는 수백 권의 문헌과 의과학 논문을
읽고 동영상 자료를 찾았다.
실증주의 교육을 받아 체화한 과학자로선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던 영적
체험들이 단순한 착각이나 환상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임을 역시 과학자의 입장에서 알게 됐다.
우리의 육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어 부패해 가더라도 우리의 의식은 또렷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의 경이로움은 이후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죽음을 내포한 생명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돼 고난과 역경을 영적인
성장의 기회로 껴안게 되었고 주어진 삶을 더욱 충만하게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임종 직전 신체 변화
임종이 가까워지면 신체에 몇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체중감소·식욕감퇴·쇠약·부종 같은 신체적 증상과 더불어 정신착란·불안·흥분 같은
정신적 증상이 같이 나타난다.
음식물을 삼키기 힘들어하거나 수면시간이 늘어나고 세상사에 대한 관심도 옅어진다.
임종이 좀더 가까워지면 소변 배출량이 감소하고 호흡 변화와 함께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며 혈액순환 장애로 인해 푸른빛이나 자줏빛 반점이 나타난다.
이밖에 떨림·발작·근육경련·정신착란 등의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임종이 임박한 환자가 이 같은 발작 증세를 보일 경우 뇌 MRI 같은
정밀검사를 하거나 간질을 억제하는 주사약을 투여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는 적절치 못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병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 의료진은 살인죄로 고소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노쇠도 질병의 하나로 보고 치료하려는 경향이 있다.
질병은 어떤 이유로 우리의 신체가 고장이 난 상태이고 이를 고쳐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의료행위이다.
그러나 노쇠는 고장이 난 것이 아니다.
이를 테면 기계가 수명을 거의 다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음식물을 삼키는 기능이 저하된 고령자에게 어떻게 해서든 음식을 먹이려고 하다보면
흡인성 페렴이 유발돼 오히려 환자를 고통에 빠뜨릴 수 있다.
눈 딱 감고 먹이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다.
고령의 노인은 먹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다해서 다시 말하면 죽을 때가
임박했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스콧 니어링은 100세가 돼 세상을 떠날 때가 되자 주위 사람들에게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나 또 다른 깨어남이므로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에서 화장한 후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채 떠났다.
‘죽음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인간의 육체는 영원불멸한 자아를 둘러싼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로스 박사의 이런 주장은 오랜 임상 경험의 결과였다.
수많은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관찰한 삶의 종말 체험과 근사체험을 통해 이끌어낸
결론이었던 것이다.
삶의 종말체험은 죽음과 관련해 일어나는 중요한 영적 현상이다.
근사체험과 공통되는 부분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른 개념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떤 환영을 보는 현상을 말한다.
대체로 먼저 떠난 가족이나 친지 또는 친구가 임종하는 사람을 마중 나온다.
이는 임종하는 사람과 가족 모두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마지막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사체험은 죽음 직전에 경험하는 사후 세계로서 자신이 죽었다는 인식을 갖고
체외이탈을 경험하고 터널을 통과하거나 밝은 빛과 교신하며 천상의 풍경을 관찰한다.
세상을 떠난 가족·친지와 만나고 자신의 생을 회고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근사체험은 갑작스런 사고로 심장과 호흡이 멎은 죽음의 상태에서 체험을 하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죽음을 경험하는 동안
평화로운 마음으로 천장에서 아래의 모든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근사체험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죽음은 꽉 막힌 벽이 아니라
열린 문이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뜻하는 것”이다.
죽은 뒤 어떻게 되나
스웨덴의 스베덴보리, 그리스의 다스칼로스, 덴마크의 마르티누스 등 신비가들에 따르면 인간은 육신이 죽은 후 소멸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정한 파동의 에너지체로 존재하게 된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파동으로서만 존재하는데 비슷한 파동을 지닌 영혼들은
서로 모이게 된다.
즉 영혼의 유유상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육신을 벗어나 비물질계로 옮겨 갔다고 해서 갑자기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지상에서 성취한 영적인 발달 정도에 따라 각자의 영혼이 끌리게 되는 여러 수준의 차원이 있다.
영계에는 비슷한 진동수를 가진 영혼들의 공동체가 수없이 존재하며 이들과 계속 유대를 갖고 집단을 이뤄 존재하게 된다.
진동수와 같은 의미를 갖는 도덕적 특이 중력이라는 용어도 관심을 끈다.
사후의 영이 처음 도달하는 장소는 이 중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지상에서 사는 동안의 선함 정도나 결핍 등으로 형성되며 에너지장이나 기운으로
나타난다.
영적인 발전 단계에 따라 어두운 색부터 휘황찬란한 광채까지 다양하다.
도덕적 특이 중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빛의 양이 제각기 다르므로 위장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속이고 더 높은 궤도로 올라가면 그것의 빛을 감당하지 못한다.
낮은 도덕적 특이 중력을 지닌 사람들은 일단 낮은 수준으로 몰리지만 발달한 영들의
도움으로 더 높은 수준으로 점차 진화해간다.
죽어서 육신을 벗어난 신참 영혼은 사후 1차 영역에 머물게 되는데 고독감·무력감·결핍감·고통·환멸 같은 감정을 느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이때 마음을 열고 간절히 기원하면 수호영혼의 도움을 받아 지상에서 사는 동안
오염되었던 삶을 정화하게 되고 손상된 영혼을 치유하고 보고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해서 원래 맑고 순수했던 영혼을 회복하고 나면 영혼이 주파수가 높아져 완전히
다른 상위 영역으로 진입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말기 암 진단을 받았거나 임종이 임박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불안해 하지 말라고 다독이고 격려하고 싶다.
근사체험이나 삶의 종말체험을 알고 있으면 죽음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불안과 공포가 크게 줄어든다.
나 역시 2018년 1월 초 암 진단을 받았다.
인간이 질병 하나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널리 알려진 ‘보왕삼매론’에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구절이 나온다.
질병을 통해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죽음을 통해 삶의 귀함을 깨닫게 되는 게 우리네
삶의 본질이다.
강의노트 기증 등 죽음 준비 중
많은 암 환자들이 암 진단을 받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의사가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는 말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수많은 사망 원인 중에서 무엇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지 예측할 수 없어 막연했었는데 정작 암 진단을 받고서는 상황이 명확해지면서 죽음 준비에 구체적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나는 죽음 준비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우선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하나씩 정리해 병원에 있는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해오고
있다.
40여년 전 의과대학생일 때 필기했던 노트, 30년 전 전임 강사였을 때의 월급명세서, 강의 노트 등이다.
서울대 병원 9층에 위치한 내 연구실에는 책이나 물건이 거의 없다.
훌훌 털고 떠나갈 수 있도록 계속 정리 작업 중이다.
장기기증서약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유언장은 이미 적성해 놓았다.
유언장은 두 딸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형식으로 작성했다.
우리의 육체는 죽으면 분해돼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다.
따라서 기일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형식을 벗어나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와인 한 잔 나누면서 같이 살던 때를 추억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본다.
죽음의 실체가 소멸이 아니고 옮겨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례준비가 부담스러울
것이 없다.
지구별에 잠시 소풍 왔다가 가는 것이니 주변을 깨끗이 한 후에 떠나야 한다.
다음에 놀러 올 후손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놓고 가는 것은 먼저 왔다 가는
사람들의 신성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정현재 교수
저서 : [신간]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 정현재
'오늘의 복음과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9/15 복음과 묵상 (0) | 2019.05.07 |
---|---|
9/14 복음과 묵상 (0) | 2019.05.07 |
9/12 복음과 묵상 (0) | 2019.05.07 |
9/11 복음과 묵상 (0) | 2019.05.07 |
9/10 복음과 묵상 (0) | 2019.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