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 복음과 묵상
2019년 7월 29일 월요일
[(백) 성녀 마르타 기념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
그때에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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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호기심, 나쁜 호기심
1980년대 초 영어를 배우는 천재 원숭이, ‘칸지’가 소개되어
세계가 깜짝 놀란 때가 있었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립대학 언어연구소에서 20년 넘게 1000개가량의 영어 단어와
그림문자를 이해시켰고 인간과의 의사소통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원숭이도 인간의 인지능력에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여졌고
어떤 것들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앞서는 면들도 보였습니다.
‘혹성탈출’과 같은 영화가 불가능한 현실만은 아닐 수도 있음에 불안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큐리어스(호기심)’라는 책을 낸 이언 레슬리는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지적호기심에 있다고 합니다.
즉, 칸지는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수많은 문장과 단어를 만들어냈지만
무엇에 대해 ‘왜?’라고 묻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결여되어 있었던 것 한 가지는, ‘스스로 더 알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만 호기심이 있어서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는 끊임없는 새로운 것들을
발명해 내며 발전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배양접시에 흘러들어와 떠다니는 곰팡이가
근처에 있는 박테리아의 접근을 막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페니실린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혹은 레이더 기술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던 퍼시 스펜서가 1945년
‘마그네트론(레이더 민감도를 높이기 위한 진공관)’에 다가가자
주머니 속의 초코바가 녹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자레인지를 고안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면
인간도 원숭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언 레슬리는 현대에 들어서 인간의 사고가 다시
동물적 수준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경우 인터넷 문화 때문인데 인터넷에 무언가를 질문하면 답이 바로바로 나오기 때문에
‘왜’ 그런 답이 나오는 지에 대해서는 물을 겨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그것을 하라면 해야 하고,
지역의 전통상 그렇게 정해져 있으면 그냥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경직된 모습은 종교에서 많이 보입니다.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에서 벌어지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가톨릭교회도 성경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하고 미사를 각 나라말로 하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라면 꼭 그렇게 해야만 하지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은 금기시 되어왔습니다.
그 이유는 가톨릭교회가 ‘호기심’이란 단어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와의 ‘호기심’ 때문에 모든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호기심을 죄악시해
“신은 꼬치꼬치 따져 묻는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마련했다.”고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저 가르치면 순종하면 되고 이유를 꼬치꼬치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에 대한 나쁜 호기심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지
좋은 호기심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왜?’, 혹은 ‘어떻게?’라고 물을 수 있는 호기심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졌다면 안 좋게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안 좋은 것을 주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은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유가 있어서 죄를 짓게 되었으니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불성설이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셨다면 좋은 데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오용하였을 뿐입니다.
성경에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다는 것은 지적호기심을 충족시켜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호기심은 우리 구원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였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호기심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지적호기심만을 채우려는 마리아를 칭찬하시며
필요한 것은 그것 한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 하느님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더 알기 위해 그분 곁에 붙어 있다 보면 성령께서 그 지적 호기심을 통해 흘러들어오며
그 사람 안에 하느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면 그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지적호기심이 많은 사람에게
더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령의 열매인데, 성령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우리가 가지이고 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방법은
그분을 더 알려고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라는 식의 말은 따라서 너무 무책임한 말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지적호기심은 성령의 은총을 받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리를 가르쳐도 마치 인터넷처럼 질문과 대답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물어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성경을 읽을 때도 끊임없이 ‘왜? 어째서? 어떻게 이렇게 되지?’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읽고 묵상하고 배우고 들으려 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받는 방법은 하느님을 더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거기서 멈추어 서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묻고 답을 얻어내십시오.
하느님을 더 알기위한 욕구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구노의 "아베마리아" 비화
어린 구노는 '음악신동'이라고 불렸습니다.
빠리 외방선교회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같은 학급엔 구노가 따라잡을 수 없을
소위 ’음악 천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였고, 선의의 경쟁자였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 친구가 음악을 전공 하리라고 생각했던 구노는 신학교에 들어간 친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식에 그 친구 소식도 묻어 왔습니다.
사제가 된 그 친구가 빠리 외방 선교회에 들어갔다고...
구노는 그 친구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중국으로 발령받아 갔다는 소식만 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구노는 그 친구를 위해 틈틈이 기도를 했습니다.
오랜 사목 후에 휴가라도 오면 옛 추억을 나누며 차를 함께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이 그 친구가 있는 중국에 가서 동양 문물도 구경하며 그 친구가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가끔씩 학교 게시판에는 붉은 글씨로 ".... 순교" 라는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평화 속에서 주님을 믿는 순박한 사람들은 전율을 금치 못했습니다.
구노도 물론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가슴 아파했고, 그 친구를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선교의 자유가 주어진 중국이기에 내심 안도했습니다.
어느 날 이었습니다.
게시판에 그 친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빨간 글씨는 아니어서 안심을 했지만 내용을 읽어본 구노는 경악스러웠습니다.
그 친구가 "조선 대교구 주교"로 임명되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구노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는, 차라리 순교하기 위해서 조선으로 들어간다는 말까지 횡횡했던 바로 그 "죽음만이 기다리는" 조선으로
들어간답니다.
구노는 날마다 주님과 성모님께 그 친구가 제발 무사히 돌아와 단 한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느 주일날이었습니다.
구노는 요란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삼종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요란하게 종이 울린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의례 그랬듯이 순교자가 또 나왔다는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달음질쳐서 뛰어간 구노는 실신지경이 되었습니다.
게시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다블뤼 주교 조선에서 순교"
눈물이 앞을 가려 서 있을 수 조차 없던 구노는 정신없이 뒷동산으로 뛰어갔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를 내려다 보시는 성모상앞에서 구노는 목놓아
울며 성모송을 바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Ave Maria는 성모송입니다.
그렇게 친구이자 조선의 주교이자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다블뤼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유명한 "구노의 아베마리아"입니다.
Sumi Jo - Ave Maria (Bach/Goun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