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 복음과 묵상
2019년 7월 18일 목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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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에너지가 넘친다
‘최강의 인생’을 쓴 데이브 아스프리는 자신의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어떻게 돈과 권력과 쾌락을 다스렸는지 그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 째는
지금 이렇게 절제 없이 산다면 20년 후에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를 그려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상상하는 20년 후의 나의 미래를 위해 지금 ‘아니오!’란 말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애정이나 인기, 돈이나 명예, 쾌락에 휩쓸리다보면
거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빼앗겨 정작 힘이 필요할 때 주저앉고 말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의사결정이 아닌 이상 삶의 모든 패턴을 자동화하라는 것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서, 어떤 운동을 얼마나 하고, 식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옷을 입고 출근할 것인지, 출근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귀가해서는 어떻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자신의 욕구를 절제해야 하고,
그 방법은 욕구를 이기기 위해 평소 생각과 판단에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학계에서 진행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판사들이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가석방 심사를 하는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10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1,000여 차례가 넘는 공판을 조사했는데, 놀라운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판결 결과’는 범죄 유형이나, 수감자의 학력, 수감 생활 등의 변수보다는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에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전에 내리는 공판에서는 판사가 매우 너그러운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판사들은 수감자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점심 전에는 거의 0%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점심 식사와 잠시 휴식을 거친 뒤에는 다시 우호적 판결을 내릴 확률이
65%까지 오른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리는 시간대’와 ‘판결 결과’의 상관관계는 꾸준하게 반복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시간대’가 ‘판결의 결과’를 가르다니,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가석방 승인 여부를 둘러싼 여러 의사결정들이 판사들의 ‘의지력 계좌’를
점차 소진시켰던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력이 바닥났을 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도출할 확률을 높이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의사결정 피로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의사결정을 많이 하면 할수록 피곤해져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생각과 판단은 우리의 의지력을 소진시켜
결국 통제해야 할 것들을 통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조: ‘최강의 인생’, 체인지 그라운드; 웅 이사의 하루공부, 유튜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은 바로 구원받기 위한 믿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벳사이다, 코라진, 카파르나움은 믿음이 없어서 수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간직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너무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생각해야 할 때에 부모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부모가 자라고 하면 자고 학교에 가라고 하면 갑니다.
숙제를 하라고 하면 하고 밥을 먹으라고 하면 먹습니다.
이것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와 겸손으로 얻는 ‘안식’은 ‘쉼’입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겸손하면 어린이처럼 에너지가 넘칩니다.
축구나 야구,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지친 선수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경기에 뛰게 하지 않습니다.
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잘하기 위한 실력도 중요하지만 선택을 하기 위한 에너지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주커버그와 같은 사람들은 옷을 한 가지만 입었습니다.
‘어떤 옷을 입을까?’에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니까 자신의 에너지의 한계를 알기에 하루의 일과를 정해놓고
온유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 부모님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해 놓은
시간표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준 하루를 이렇게 알차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주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그래서 주님의 뜻에 따라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미리 생각해보고 잠자리에 들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잠자기 전에 감사 일기를 쓰고
다음 날 할 일들을 시간을 생각하며 시간표를 짜 봅시다.
다음 날 훨씬 힘이 덜 들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메어주시는 멍에를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은 일일이 고민하고 선택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의 멍에를 통해 평안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② 예수는 사람의 아들인가, 신의 아들인가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멀지 않았다. 남쪽으로 8㎞쯤 떨어져 있었다.
검문소 이쪽과 저쪽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예루살렘은 깔끔한 유럽의 도시 같았고,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예수의 모자이크 벽화.
예수는 백인이 아니라 중동 사람들의 외모에 더 가까워 보인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낙후됐다. 비포장길도 많았다. 흙먼지를 날리며 버스가 달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어쩌면 내가 탄 버스 기사처럼 생겼을까. 아니면 검문소를 통과할 때
예수의 출생은 파격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마리아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당대에 결혼이란 집안간의 만남이었다. 결혼 상대자도 대부분 부모가 결정했다. 가문의 명예는
성서에는 간음한 여자를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는 대목이 나온다. 혼전 임신도 마찬가지다. 집안의 남성들은 임신한 여성을 돌로 쳐 죽이는 게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첫 마디가 그랬다. "두려워하지 마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1818~1882)의 그림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작품 '수태고지'.
마리아는 당시 몇 살이었까. 그런 운명을 감당할만한 나이나 됐을까.
성서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마리아가 몇 살인지, 예수와 몇 살 차이인지 아무런
당시 풍습을 통한 추정은 가능하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였다. 양가에서
당시 갈릴리 지방에서 여성은 첫 월경을 하는 나이가 되면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때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의술도 발달하지 않았으니 출산
그럼에도 열서너 살이면 아직 어리지 않았을까. 성령에 의해 임신이 되는 '초월적 사건'을 목숨을 걸고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았을까.
천사 가브리엘은 아이의 이름까지 불러주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로마 시대의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는 『유대 전쟁사』에서 "당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니 국어책에 등장했던 '철수'나 '영희'처럼 유대인에게 흔하고 친숙한 이름이 바로 예수의 이름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은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버스 안에서 읊조려 봤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철 그리스도'나 '정환 그리스도'로. 그렇게 한국식으로 바꾸어 불렀더니 친근한 어감이 확 다가왔다.

구약성서는 대부분 히브리어로 기록됐다. 유대 민족이 오랜 세월 바빌론의 포로가 되면서 말이 바뀌었다. 예수 당시에는 히브리어가 일상 언어는 아니었다. 구약을 연구하는 일부 율법학자들만 익히는 문자 언어였다.
훗날 이스라엘의 건국(1948년)과 함께 히브리어가 다시 유대인의 공용어가 됐다. 그럼
그건 아람어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썼다. 그리스어는 외교용
예수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썼던 언어는 다름 아닌 아람어였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Yehoshuah)'이고, 아람어로는 '예수아(Yeshua)'다. 그러니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의 이웃들이 어린 예수를 부를 때는 "예수아! 예수아!"라고 불렀을
버스가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해발 770m의 산악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차에서 내렸다. 베들레헴은 ‘베들(House)+레헴(Bread)’으로 ‘빵 만드는 집’이란 뜻이다.
이곳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중의 성지다. 가톨릭 신자들도, 크리스천들도, 딱히 종교가
지금은 마구간이 없었다. 대신 예수가 태어난 자리에 교회가 서 있었다. 약 1500년 전에 세워진 ‘예수탄생 교회’다. 325년에 지었다가 파괴되고 529년에 재건됐다. 529년이면

예수탄생 교회의 출입구. 높이가 1.2m에 불과해 머리를 숙여야만 들어갈 수 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누구나 머리를 숙여야 했다. 말을 타고 교회 안에 들어오는 걸
예외는 없었다. 순례객들은 다들 머리를 숙였다. 그건 일종의 ‘내려놓음’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갔다. 1500년 전에 지은 교회의 실내 양식은 아주 독특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처럼 40여 개의 굵다란 기둥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서있었다. 앞에는 제단이 있고,
교회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 예수가 태어난 ‘바로 그 장소’가 있었다.
한참 후에 순번이 왔다. 바닥에는 별 모양의 장식이 있었다. 그 별 한가운데 손바닥 만한 작고 동그란 유리창이 있었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곳이 예수가 태어난

순례객들은 바닥에 엎드려 예수가 태어난 ‘그곳’을 들여다 봤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례객들은 저마다 눈을 감고 묵상에 잠겼다.
줄 선 사람들이 많아 오래 볼 수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탈하고 당혹스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뒤로 돌아서는데 문득 성서 구절이 뇌리를 때렸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복음 1장3절)
그랬다. 저 어둠, 작은 구멍 속의 저 어둠. 그건 태초의 어둠과 통했다. 태초의 어둠이
불교에서는 그걸 ‘공(空)’이라 부른다.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다. 모든 색
숫자로 표현하면 ‘0’이다. 태초의 어둠도 ‘0’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0’이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가 다석(多夕) 유영모는 신을 부를 때도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
예수탄생 교회를 나왔다. 팔레스타인 청년이 다가와 “헤이, 브라더!”하며 기념품을 사라고 했다. 나는 ‘브라더!’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도
성서에는 ‘예수의 형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온 예수를 향해 마을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마가복음서에 적혀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예수는 맏이였다. 그에게 동생과 누이가 있었을까. 민감한 논쟁거리다. 현대 신학자들은 상당수 ‘예수에게 형제가 있었다’고 본다.
반론도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형제뿐 아니라 사촌들도 다 ‘브라더(Brother)’라고 불렀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형제’는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이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시각도 강하다.
그럼 이게 왜 ‘논쟁의 뇌관’일까. 이유가 있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인가, 아니면 ‘신의
그런데 신의 아들로 보면 적잖이 불편해진다. 성령으로 잉태한 적이 있는 마리아의 몸에서 요셉의 자식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를 신학적 용어로 ‘하느님의 독생자
성서에는 예수에게 네 명의 형제와 적어도 두 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고향의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가 풀어놓은 지혜에 놀라면서도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예수는 그저 이웃사람 마리아의 아들일 뿐이었다. 남동생들과 누이들의 형이자 오빠일 뿐이었다.
예수가 직접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 자신을 스스로 무엇이라 불렀을까. 예수는 평소 자신을 지칭할 때 ‘메시아(구원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인자(人子)”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란 뜻이다.
그런데 ‘인자(人子)’의 뜻은 깊다. 그 울림도 크다. ‘인자’가 히브리어로는 ‘Aben adam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성당의 천장에 그린 아담의 모습.
사람들은 생각한다. 신의 외모가 인간의 외모와 똑같을 거라고. 우리처럼 눈이 있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한 차동엽 신부는 “‘형상’이란 단어에 주목
‘셀렘’은 본질 혹은 속성이 닮았을 때 쓰는 말이다. 겉모양만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결국 성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외모가 아니라 속성을 본 따 인간을 지었다’는 뜻이다. 차 신부는 “하느님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며 ‘하느님은 이런 존재’라고 못박는 건 곤란
예수탄생 교회의 제단 앞으로 갔다. 눈을 감았다. 예수가 온 곳은 어디일까, 또 예수가
하느님은 당신의 속성(Selem)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구약 창세기 1장27절).
그러니 아담 안에 신의 속성이 흐른다.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아담의 아들”이라고 한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달리 말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자신 안에 가득 찬 ‘하느님의 속성’이
버스는 덜컹거리며 베들레헴을 떠났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물음이 올라왔다.
20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아들인가. 당신의 주인공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