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 복음과 묵상
2019년 7월 17일 수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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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선택 받는 철부지 어린이
미국의 코미디 드라마 ‘사인펠드’는 처음에 누구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했습니다.
철저히 관행을 벗어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영자들과 전문가들은 사인펠트의 평가서에 ‘빈약하다’와 ‘보통’ 사이에 점수를 주었다가,
그냥 ‘빈약하다’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엄청 많은데, ‘스타워즈’, ‘이티’, ‘펄프픽션’ 등의 수많은 성공작들은
영화 제작 스튜디오 경영자들에게 여러 번 퇴짜 맞은 작품들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해리 포터’ 등도 출판사들에게 퇴짜 맞은 작품들입니다.
우리나라 가수 서태지가 신인이 검증받는 프로에 나와 전문가들에게 혹평을 받는 장면은
아직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인기 스타들과 전문가들은 서태지가 음악 시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신인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시청자 평가단입니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분야에 대한 너무 편협한 시각을 지니고 있어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점수를 먹이면 더 정확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시청자 참여단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시청자들의 대표로 ‘선택 받았다’는 생각이 올바른 시각을 방해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오리지널스’의 애덤 그랜트는 어떤 작품에 대해 가장 평가를 어긋나게 내리는 사람들은
그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팔아야하는 경영자들,
그리고 그 작품을 평가하는 전문가 집단이라고 합니다.
작품을 내어놓은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의 작품을 과대평가 하는 경향이 있고,
경영자들은 돈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하며, 그리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뛰어남을 내세우기 위해 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업구상을 하여 자신의 사업이 잘 될 수밖에 없다고 여기저기 돈을 빌려서 망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확신을 믿고 보증까지 서 주어 피해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만 믿고 투자를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마도 이런 심리로 부모님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다른 아이들보다 과대평가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잘 알아볼까요?
선생님들은 잘 알아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중에 성장한 아이들은
선생님이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자랍니다.
놀던 아이들이 더 성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를 변화시킬 역사적 성과를 낸 이들은 선생님으로부터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은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선생님도 자신이 전문가라 아이들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교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이 물을 물로, 산을 산으로 못 보게 만드는 가장 큰 장애입니다.
일단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교만이 들어서면 그 사람의 판단은 흐려지게 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이나 자기 자신이 만든 작품에 대해 자신이 내리는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처음 책을 쓸 때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읽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평가엔 교만이 섞여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교만은 뱀처럼 나의 눈을 흐리게 만들어 결국 선악과에까지 손을 뻗치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누가 옳게 내릴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항상 ‘어린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이란 것이 아직 어린이의 눈을 흐리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전문가들이라 자처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사제들은
결국 하느님의 아드님을 못 알아보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당신의 아드님을 내려 보내셔서 겸손한 이들을 찾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어린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선택받아 진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지혜는
어린이와 같이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 이가 지니고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③ 예수가 말한 '회개'는 그게 아니었다

유대 광야는 거칠고 단조로운 땅이다.
성서에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광야처럼 간결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스라엘의 사막은 달랐다. 바람이 만든 모래결과 굴곡진 지평선이 한 폭의 그림을 빚어
예수가 태어나기 500년 전이었다. 인도의 붓다도 ‘광야’로 향했다. 그 광야는 사막이
한국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 계룡산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요즘도 계룡산에는 온갖
예수 당시 유대 광야에는 여러 수도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쿰란공동체의 유적. 2000년 전에 있던 수도공동체의 흔적이다.
광야를 걸었다. 메마른 땅이었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갔다’고
광야에서 회오리 바람이 일고 있다.

여리고의 시험산에서 예수는 악마의 유혹과 싸웠다.
시험산 중턱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있다.
예수는 악마를 세 차례나 무너뜨렸다. 악마는 ‘내 안의 욕망’이다. 왜 그랬을까. 그게
여리고의 시험산에서 예수는 40일간 금식하며 악마와 싸웠다. 시험산 중턱의 가파른 절벽에는 1500년 전에 세운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수도원 안에는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할 때 머물렀다는 동굴이 시험산 수도원 내부에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모자이크 벽화.
예수도 나사렛을 떠나 세례 요한을 찾아왔다. 실제 세례도 받았다. 예수가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마태복음 3장16절)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 이바노프(1837~57)의 작품 ‘군중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미국의 유진 피터슨 목사는 저서 『메시지』에서 요한의 말을 이렇게 풀었다. “너희의 뱀가죽에 물을 좀 묻힌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 같으냐? 바꿔야 할 것은 너희 겉가죽이 아니라 너희 삶이다!”(마태복음 3장7~10절). 요한의 발언은 ‘예수 당시’뿐 아니라 ‘요즘 시대’

요아킴 파티나르(1480~1515)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
예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로 내려오고 있다.
선악과(善惡果)는 원래 한 덩어리의 열매였다. 거기에는 쪼갬이 없었다. 아담과 이브가
그때 하느님이 아담을 찾았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앞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성서에는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게 쪼갬의 결과물이다. 그걸 안고선 ‘신의 속성’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담은 하느님 속으로, ‘신의 속성’ 속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루벤스의 작품 ‘낙원의 아담과 이브’. 이브가 선악과를 따서 아담에게 건네고 있다.
예수 당시 지중해 지역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다. 신약성서는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회개하라’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다. 도올 김용옥은 그걸 ‘회심(回心)’
수년 전이었다. 네팔에서 나이 지긋한 힌두교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이마에 붉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는 “제3의 눈”이라고 했다. “‘제3의 눈’이 뭡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는 ‘마음의 눈’”이라고 답했다. 그랬다. 그들이 이마를 붉게 물들이며 그토록 간절히 구하는 건 ‘마음의 눈’이었다. 그게 누구의 마음일까. 지지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예수의 눈’은 어떤 건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가 외친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는 그렇게 역설한다. 결국 ‘회개하라’는 ‘눈을 돌리라’는 뜻이다. 관점을 돌리라는 말이다. ‘나의 눈’에서 ‘신의 눈’으로 바꾸라는 의미다. 왜일까.거기에 자유와 평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하느님 나라’이니까.

헤롯 안티파스의 생일 잔치에서 농염한 춤을 추는 살로메.
구스타프 모로(1826~1898)의 작품 ‘환영’의 일부.
마침 헤롯의 생일 잔치가 열렸다.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첫 남편의 딸)는 춤을 추었다. 다들 감탄했다.
헤롯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해라. 맹세하건데, 네가 말만 하면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마가복음 6장22~23절)고 말했다. 어머니에게 달려간 살로메가 돌아와 말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세요.”(마가복음 6장25절) 헤롯 왕은 손님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Ⅱ(살로메)’.
구스타프 클림트도 ‘유디트Ⅱ(살로메)’라는 작품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다루었다.
요르단강은 지금도 흐른다. 예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2000년 세월을 관통하며

로마 시대의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37?~100?)는
역사서에서 세례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24㎞ 떨어진 마케루스 요새에서 처형당했다고 기
록했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