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 복음과 묵상
2019년 7월 16일 화요일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믿음의 그릇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자기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가 그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얻고자 그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정원은 온갖 기화요초로 가득했고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꾸며졌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집을 자랑하느라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부자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어버렸습니다.
당황한 부자에게 디오게네스가 처음으로 한 마디 했습니다.
“아까부터 침 뱉을 곳을 계속 찾았는데 이 집은 너무 아름다워
침 뱉을만한 곳이 한 군데도 없더군요.”
교만한 사람은 침을 맞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믿는 마음입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마음도 자신을 믿는 마음이기에 교만입니다.
이런 마음은 영광이 아닌 침 뱉음을 받게 됩니다.
칭송을 받거나 저주를 받는 것은 다 자신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킨 티로와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혼내십니다.
그 많은 기적을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셨다면 그들은 회개하였을 텐데
이 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은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말씀만 가지고는 그들이 왜 그렇게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밑에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보고도 믿으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반대였던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완고하여 예수님께서 기적을 그렇게나 많이 보여줘도
믿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간직할 마음의 그릇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을 믿지 않을 때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덜 믿는 만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의 크기가 믿음을 담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위대한 성인이 되기 위해 한 수도원에 들어온 젊은 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외모도 출중하고 머리도 똑똑하여 못 하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이 많은 수도자들은 이 젊은 수사에게 의지해야 했습니다.
젊은 수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그 수도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자만해졌습니다.
어느 날 일을 하다가 나이 많은 수도자는 새파란 수도자와 일을 하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자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흙이 단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한다네.
자네를 쌓아가지 말고 깨어가게.
이 일을 시작하면 비로소 수도원에 들어온 것이라네.”
오늘 저주 받는 도시들의 사람들은 고집 세고 교만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마음을 잘 가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소홀히 하고 다른 것을 해봐야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잘 가꾼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죽여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믿음의 그릇이기에 마음을 가꾸지 않으면 믿음도 담겨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믿음을 부어주어도 믿음이 담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저주받은 도시들처럼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믿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내 안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기 전에 그 믿음을 담을 그릇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④ 예수보다 더 강한 나만의 신은 누구?
예수도 이 길을 걸었을까. 홀로 요르단 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터벅터벅 걸었을까.
세례 요한은 달랐다. 그는 안목이 있었다. 광야에서 예수가 세례를 청했을 때 요한은
중국 춘추시대였다. 백아(伯牙)는 거문고의 명수였다. 그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가
하늘 높이 솟은 게 마치 태산(泰山)같다.”
가락으로 강물을 읊어도 읽어냈다. “넘칠 듯 넘칠 듯이 흘러가는 게 황화(黃河) 같다.”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 그게 ‘백아절현(伯牙絶絃)’이다. ‘마음의 소리’를 아는 이, 즉 ‘지음(知音)’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갈릴리로 가던 밤,
기록에는 없지만 세례 요한은 예수에게 숱한 질문을 퍼붓지 않았을까. ‘하느님 나라’에
그런데 예수는 달랐다. 거문고의 줄을 끊지 않았다. 갈릴리로 가서 오히려 더 많은 가락을 연주했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하느님 나라’를 풀어서 메시지로 펼쳤다.
이스라엘은 광야와 따가운 햇볕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위로 갈수록 나무도, 꽃도
갈릴리 지역에 들어섰을 때는 두 눈을 비벼야 했다. 믿기지 않았다. 거기는 푸르디푸른 ‘제주도’였다. 커다란 호수, 풀이 무성한 언덕, 울창한 나무들. 정말 가슴 밑바닥까지
버스에서 내렸다. 바람이 상쾌했다. 성서에서 숱하게 들은 이름, 갈릴리 호수.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갈릴리 호수가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육안으로 보기에는 호수보다 바다에
영어 이름도 ‘Sea of Galilee’(갈릴리 바다)다. 동서 폭이 14㎞, 남북의 길이는 무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왜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초록이 더 많아졌는지 말이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토요일에 회당을 찾았다. 유대인들이 그곳에 모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설교를 했다. 주제는 ‘하느님 나라’였다. 예수는 자기 내면에 흐르는 ‘신의 속성’을 풀었다. 나와 세상과 우주가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떻게 맞물려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권위’라는 게 어떤 걸까. 그건 어떨 때 생겨나는 걸까. 마음으로 끄덕이는 ‘권위’는
호숫가를 걸었다. 예수의 고향은 갈릴리에서 멀지 않다.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도 종종
‘이 커다란 호수와 푸른 나무들, 갈대가 가득한 언덕, 바람과 함께 철썩대는 파도.
갈릴리의 풍성한 물과 푸른 나무는 예수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정겨운 일화가 성서에 한 토막 있다. 예수가 고향 나사렛에 머물 때였다. 그날도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이 찾아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광경을 그려본다. 혹시 그때가 저녁 무렵은 아니었을까. 성서에 기록된 게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예수아! 밥이 다 됐어. 집에 와서 식사해!” 그런 전갈은 아니었을까. ‘예수(Jesus)’의 이름은 아람어로 ‘예수아(Yeshua)’다. 이런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찾고 있습니다”(마가복음 3장32절). 예수는 사람들에게 되물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멀뚱멀뚱한 눈으로 예수를 쳐다봤을 터이다. 예수는 자신을 빙 둘러싼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장35절)
예수의 답은 파격이었다. 그건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고, 그 속성을 공유하는 이의
예수의 ‘물음’이 가슴에 꽂혔다. “누가 나의 어머니고, 누가 나의 형제인가.” 예수의 ‘답’도 가슴에 꽂혔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이들이 내 형제다.”
왜 그리 묻고, 왜 그리 답했을까. 예수의 눈에는 왜 그렇게 보였을까. 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들은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나는‘순종’이라는 말을 안고 눈을 감았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 무슨 뜻일까.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하고, 교회에서
대체 예수가 말한 ‘순종’은 무엇일까. 답은 멀리 있지 않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 답과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 그들은 누구일까. 우리는 착각한다. 나와 종교가
모세가 받은 십계명 중 하나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다. 흔히 불상에 절을 하거나,
십계명에서 경고한 ‘우상’은 멀리 있지 않다. 아주 가까이 있다. 하느님보다 더 강력하게, 더 열정적으로 섬기는 ‘나만의 신’. 그게 대체 누구일까.
그렇다. 그게 바로 ‘나’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도 ‘나의 뜻’에는 순종한다.
그리스 아테네에 간 적이 있다. 30년째 거기서 사는 한국 여성을 만났다. 남편은 그리스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리스 정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궁금해서 물었다. “이곳 사람들의
그녀는 며칠 전 참석한 교회 장례식 이야기를 했다. “평소 잘 알던 이웃이 자식을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우리 같으면 하느님께 따지지 않겠나. 울고불고 매달리지 않겠나. 왜 내
전통이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게 아니라 ‘신의 뜻’을 묻는 그리스도교의 고귀한
십계명 중 하나다. 사람들은 이걸 두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계명’이라고 말한다.
인도의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물론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아기 붓다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 우주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무 오만한 것 아닌가.
진보와 보수는 일종의 방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어느 한쪽의 시각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도 그랬다. 예수의 눈은 무한히 넓고, 무한히 깊었다. 왜 그럴까. 예수의 주인공은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섬기려야 섬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만 있으니까. 그걸 붓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표현했다. 오직 그것만이
그 눈으로 예수는 물었고, 그 눈으로 예수는 답했다. “누가 나의 어머니고, 누가 나의 형제인가. 이들이 내 어머니고, 이들이 내 형제다.”
겉모습은 분명 둘이다. 너와 나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보수와 진보가 다르다. 그러나 바탕은 둘이 아니다. 각자의 에고가 무너지면 ‘신의 속성’이 드러난다. 거기서
나 외에 다른 신이 누구인가. 나 외에 다른 신이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