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7/15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2. 27. 18:10

2019년 7월 15일 월요일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샘플 사용 가능한 신앙

화장품이나 혹은 이와 유사한 제품들에는 ‘샘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샘플을 조금 써보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샘플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더 많은 제품을 팔기 위한 하나의 장사수단입니다.


샘플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많은 양을 구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샘플을 억지로 내밀며 뿌려보라고 하면 ‘미안해서 사야 되지 않을까?’라는

부담감이 들어 아예 그 쪽으로 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어야 우리는 참으로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도 이런 식으로 전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처음엔 아주 무시무시한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께서는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족이 서로 갈라지게 되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십니다.

당신을 받아들이면 가족과도 원수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도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말라는 식입니다.

박해 시대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이 말씀이 맞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고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가족을 먼저 생각할지, 믿음을 먼저 생각할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때 가족을 선택하게 된다면 당신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의인을 의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버리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가족의 애정 같은 것도 버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찬송에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과 사탄이 내미는 것과의 가치를 재며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내려와 보면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가족의 애정까지도 끊을 각오를 하고 당신을 따라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다가,

물 한 잔만 봉헌할 수 있어도 반드시 상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끝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처음부터 뛰어들기 겁나거든 아주 조금만이라도 받아들여 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물 한 모금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봉헌하는 것이 더 좋은지, 그냥 마셔버리는 것이 더 좋은지

일단 해 보고 결정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일종의 복음 샘플인 것입니다.

저도 강론을 쓰기 싫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생각은 안 나고 올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럴 때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고생하면서 사랑받는 게 낫니, 푹 쉬면서 아무 사랑도 못 받는 게 낫니? ...

그냥 안 써도 되게 해 줄까?”


그러면 저는 정색을 하고 “아뇨, 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외칩니다.

사실 큰 고생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어주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도 인정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면에서는 ‘내가 고생하는 것에 비해 그만큼 만족이 오고 있는가?’

란 질문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엔 강론을 주일만 올렸습니다.

그것도 아는 지인들에게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매일 쓰게 되었고, 지금은 여러 군데 올라가고 있습니다.

카톡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읽으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만약 주일 강론만 지인들에게 보낼 때 그 노력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적다고 느꼈다면

지금까지 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샘플을 써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문제는 거의 공짜인 샘플도 써 보지 않고 지례짐작으로 “안 사!”라고 해 버리는 마음일 것입니다.

어떤 연예인이 병역을 기피한 일 때문에 괘씸죄로 입국이 거부당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습니까?

만약 군 생활도 샘플이 있었다면 그렇게 겁먹고 바로 국적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다행히 샘플이 있습니다.

냉수 한 잔을 주는 행위도 하늘나라의 행복을 줍니다.

샘플을 잘 이용해 좋은 것을 많이 사서 부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⑤ 예수는 왜 사람을 낚으라고 했을까?  

  동이 텄다.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이토록 삭막한 땅에 어떻게 이토록 큰 호수가 있을까.’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었다.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이 차가웠다. 느껴보고 싶었다. 2000년 전 예수도 맛 보았을 호수의 숨을 말이다. 예수는 이 주변을 걷다가 어부들을 만났다.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였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복음 4장19절)


그 말을 듣고 둘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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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고 있다.

예수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한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 의미를 묻듯이 바라보고 있다.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1308~11년작 ‘베드로와 안드레의 부르심’.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발바닥에 뭔가 밟혔다. 미끈했다.
돌멩이 같았다. 손으로 집었더니 조개였다.
유대인은 율법에 따라 조개를 안 먹는다.
조개뿐만 아니다.
새우와 오징어 등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수산물도 먹지 않는다.
또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동물의 고기만 먹는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안 먹는다.
유제품을 먹을 때도 엄격하다.
치즈와 버터, 우유 등 소에서 나오는 유제품은 쇠고기와 함께 먹을 수가 없다.

아침에 숙소에 차려진 간단한 뷔페 식단도 그랬다. 요구르트와 치즈, 우유는 있었지만
쇠고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단은 그 반대였다.
쇠고기는 있지만 우유나 치즈는 없다.
이런 식으로 지켜야 하는 유대인의 율법이 무려 613개다.
그래서일까. 호수 바닥에는 조개가 지천이었다.
조개 껍질을 손으로 문질렀다.
무슨 뜻일까. ‘사람 낚는 어부(Fishers of men)’.
예수가 말한 ‘사람을 낚다’의 의미는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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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곁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서 있다. 야고보가 무릎을 꿇고 있고,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제자 요한이 뒤를 따르고 있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그들이 버린 그물은 무엇이었을까.

마르코 바사이티의 1510년작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부르심’.

베니스 아카데미 미술관 소장.



도식적으로 풀면 간단하다. 전도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해서 교회 신자 수를 늘리는 일이다. 사람들은 그게 ‘사람 낚는 어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ㆍ둘ㆍ셋 세면서
‘내가 전도한 숫자’에 열을 올린다. 훈장이라도 세듯이 말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정해진 숫자를 채우는 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는 필수조건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을까.

호수의 물결이 무릎에서 찰랑거렸다. 곰곰이 생각했다. 갈릴리 호수에 처음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는 누구였을까. 그랬다. 그건 예수였다. 예수야말로 그런 어부였다. 그럼 예수는 어떻게 고기를 잡았을까. 그의 그물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서에는 ‘예수의 낚시법’이 비유적으로 표현돼 있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장4절) 그게 예수의 낚시법이다.
 

갈릴리 호수에 파도가 치고 있다.

이곳에서 물고기를 낚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사람을 낚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묻게 된다. 인생에서 내가 낚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지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낚는 어부인가.


겉으로만 보이는 예수가 다가 아니다. 예수의 주인공은 ‘신의 속성’이다.
그 속성이 말한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그렇다. 신의 속성은 지금도 거(居)한다.
차별 없이 내리는 햇볕처럼. 내 안에도, 당신 안에도, 우리 안에도, 그들 안에도 거한다. 왜 그럴까.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우주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신의 속성은 가득하다. 그 ‘하나’뿐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하느님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오직 그 하나만 있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정말 하나라면 예수가 굳이 낚시를 할 이유는 없다. 모두가 하나인데 굳이 그물을 던질 까닭도 없다. 그런데 예수는 그물을 던졌다. 왜 그럴까. ‘착각’ 때문이다. 하나인데 하나인 줄 모르는 우리의 ‘착각’ 때문이다. ‘신의 눈’이 ‘에고의 눈’으로
바뀌면서 생겨난 거대한 착각이다.

예수는 그 착각을 깨라고 했다. 그걸 깨기 위해 눈을 바꾸라고 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에고의 눈’을 ‘신의 눈’으로 바꾸려면 우리가 거하는
곳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배를 저으라고 했다. 깊은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물을 내릴 장소를 바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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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은 “젊었을 때부터 나는 ‘성서’에 사로잡혔다. 성서는 내게 가장 위대한 시정(詩情)의 원천이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방금 창조한 아담을 천사가 안고서 날고 있다. 샤갈은 유대교인이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려져 있다. 샤갈의 열린 마음이 보인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 ‘인간창조’.

프랑스 니스 박물관 소장.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는 달랐다. 그때는 하나였다. 하느님이 아담 안에 거했고, 아담이 하느님 안에 거했다. 둘의 속성은 하나였다. 그때는 ‘착각’도 없었다. 선악과를 먹으면서 틈이 생겼다. 아담은 더 이상 하느님 안에 거하지 않았다. 대신 ‘나’라는 에고 속으로
거했다. 그때부터 아담은 ‘신의 눈’이 아니라 ‘에고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눈이 바뀌자 에덴 동산도 사라졌다. ‘하느님 나라’가 사라졌다. 에덴 동산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아담과 이브가 산 넘고 물 건너 거주지를 옮긴 게 아니다. ‘신의 속성’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아담은 에덴에서도 벗어났다. 속성이 같으면 하나가 되고, 속성이
다르면 둘이 된다. 그게 추방이다. 그러니 에덴동산이 그 옛날 아프리카의 어디쯤이니,
아시아와 유럽의 어디쯤이니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담과 이브는 신의 속성을 잃을 때 낙원을 보는 눈도 잃었다. 어쩌면 우리는 낙원에 살면서도 낙원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사쵸디 산 지오바니의 1427~28년 작 ‘낙원에서의 추방’.

 
만약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이브가 추방 당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낙원의 삶을 살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의 눈’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에덴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마태복음 4장17절)


그게 예수의 낚시다. ‘사람 낚는 어부’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나의 눈을 덮고 있는
 ‘에고의 비늘’을 벗기고,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신의 눈’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니
전도를 많이 해서 우리 교회 신자 수를 늘리는 걸 ‘사람 낚는 어부’와 동일시한다면
곤란하다. 그건 예수의 뜻을 너무 얕게 해석하는 셈이다. 그보다는 스스로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진정으로 예수에게 낚였는가. 다시 말해 나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나. 나의 눈인가, 아니면 신의 눈인가. 그걸 물어야 하지 않을까.

갈릴리 호숫가는 아름답다. 꽃과 풀과 나무가 생기를 뿜어낸다.

예수는 저 어디쯤으로 배를 저어가라고 했을까.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산책로가 좋았다. 한 바퀴 도는 데만 63㎞다. 자전거를 빌리면 하루 코스다. 예수는 갈릴리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곳에는 어부들이 많았다.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에게 모였다.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예수의 메시지를 가슴에
담았다. 그 장소가 여기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배에 올라타 해안에서 약간 떨어진 뒤, 배를 설교단 삼아 가르침을 펼쳤다.(누가복음 5장3절) 설교를 마쳤을 때 예수가 시몬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저어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누가복음 5장4절) 한글 성서에는
이렇게 번역돼 있다. 신약성서는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그리스어를 영어로 직역한 성서는 더 구체적이다.

“Back up into the depth, and lower your nets for a catch.(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
오라. 그리고 그물을 내려서 잡아라)”(누가복음 5장4절)

예수는 말했다.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예수는 왜 “깊은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고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까. ‘돌아오다’는 그리스어로 ‘epanago
(에파나고)’다. 그곳은 어디일까. 혹시 우리는 한때 그곳에 머문 적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예수는 “다시 돌아오라”고 한 걸까.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멀지 않다. 그것은 ‘내 안’에 있다. 그러니 언제든지 배를 저어서

갈 수가 있다.

라파엘로 산치오의 1515년작‘고기잡이 기적’.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 소장.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들었다. 푸른 호수에, 푸른 하늘에, 푸른 바람. 가슴이 탁 트였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저 어디쯤으로 배를 옮기라고 했을까. 성서에는 배를 옮겨 그물을
내렸더니 물고기가 한가득 잡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럼 예수는 단지 고기 잡는 포인트를 알려 준 걸까. 그뿐일까. 그리스어 성서에서 ‘깊은 곳’에 해당하는 단어는 ‘바소스
(Bathosㆍβαθοζ)’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는 ‘바소스’라는 단어에 ‘바닥이
없는 심연’이란 뜻이 있다고 했다.

그럼 예수는 왜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한 걸까. 그리고 거기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까. 예수가 말한 ‘깊은 곳’은 대체 어디일까. 호숫가 언덕의 풀밭에 앉았다. 세상 모든 것에는 ‘바닥’이 있다. 끝이 있다. 다시 말해 유효기간이 있다. 길바닥의 돌도, 거리의 나무도, 하늘의 해도, 밤이 되면 솟는 달도, 인간의 육신도 다 유효기간이 있다.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마련이다. 그럼 바닥이 없는 건 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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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의 1933년 작 ‘고독’. 한 유대인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자신의 심연으로 찾아가는 중일까. 바닥이 없는 하늘에서 천사가 날고 있다.


“깊은 곳으로 가라”는 예수의 말을 듣고 시몬(베드로)이 답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
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누가복음 5장5절) 그렇다. 우리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린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그물을 내린다. 돈을 건지고, 명예를
건지고, 권력을 건진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한다. 그런데 그 모든 물고기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결국 소멸하고 만다. 그러니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고, 밤새도록 그물을 올려도 허전할 뿐이다. 결국 알게 된다. 시몬(베드로)의 말처럼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불교에서는 그런 물고기를 ‘색(色ㆍ물질과 감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색(色)을 붙들지 마라”고 한다. 모든 물고기는 사라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색(色)’을 움켜 쥔다.
그게 전부라고 여긴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 놈의 물고기(色)는 잡으면 사라지고,
잡으면 사라지고, 잡으면 또 사라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세게 거머쥔다. 물고기가
사라지면 다른 물고기를 찾고, 사라지면 또다른 물고기를 찾는다. 결과는 똑같다. 결국
한 마리도 잡을 수가 없다. 대신 ‘사라지는 물고기’의 정체를 뚫으면 달라진다. 공(空)이 드러난다. 아무 것도 없는 공이 아니다. 이 우주를 다 채우는 공이다. 거기에는 소멸이
없다.

예수는 깊은 곳으로,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오라고 했다. 거기가 어디일까. 이 우주를
통틀어 바닥이 없는 곳은 딱 하나다. ‘없이 계신 하느님.’ 거기에는 바닥이 없다.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예수는 “거기로 가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로 다시 돌아오라”
고 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가 거기서 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아들이다.
하느님이 코숨으로 ‘신의 속성’을 불어넣은 아담의 자식이다. 그래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잠자는 심연으로, 신의 속성으로, 그 깊디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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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코숨으로 아담에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의 일부.
 


예수 당시 갈릴리 호숫가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있었다. 아픈 사람들과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