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7/6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2. 26. 13:43

2019년 7월 6일 토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새 포도주는 성령이시고 새 부대는 예수님이다


광해 8년, 왕위를 둘러싸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하루하루 목숨을 위협받는 현실에

왕의 히스테리와 분노는 날로 늘어갑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이 탄 독으로 인해 광해는 의식불명이 됩니다.


허균은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을 각오하고

왕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임시 왕으로 앉힙니다.

임시 왕은 궁녀로 팔려온 아이의 사정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도록 하며, 쓸데없는 군사 파병을 막습니다.

그는 껍데기는 왕이지만 속은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니 백성을 섬기는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사신이 온다고 최고 극진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에 열이 받은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이 가짜 왕이 진짜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꾸민 이야기라 하더라도 만약 이런 식으로 광해가 계속 집정을 하였다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것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며 다른 이들을 적으로 여기며 백성을 바라보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백성을 바라보느냐는 큰 차이입니다.

백성의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백성의 마음을 알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입니다.


참 왕은 자리만 지키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옷을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에게 넘길 수 있는 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자리에 맞는 그릇일 것입니다.

사제도 신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 여기며 신자들을 바라본다면

참으로 겸손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사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또 그 모습에 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자처하시고

당신의 자리를 가장 작은 우리가 앉도록 높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왕의 그릇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엔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해석을 잘못하는 바람에 애꿎은 에사우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에사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참 왕으로써 자신의 장자권을 우리 하찮은 예물인 빵과 포도주를 받고 넘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에사우는 붉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당신의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를 덮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심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옷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우리가 왕이 되게 하신 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써의 그릇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은 바로 성령을 받음으로써 일어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심판관으로써 눈을 감고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은 야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레베카는 교회로써 야곱에게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하면서 에사우의 옷을 입혀줍니다.

에사우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위해 저주받기로 예정된 분이십니다.


레베카는 에사우가 우리에게 장자권을 주더라도

자신의 장자권을 영원히 잃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에사우만이 껍질이 벗겨지더라도 하느님께 사랑받을 유일한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야곱이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아도

결국 에사우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처지로 에사우를 만나게 됩니다.


어쨌건 야곱이 에사우라고 끝까지 우겨야하는 이유는

에사우만이 이사악이 주려는 상속을 감당할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 믿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당연히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감당이 되지 않아 성령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성령을 받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라고 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고 교회가 신부가 되면 그분과 한 몸이 됨으로써

우리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혼인이 완성되는 시간이 성체성혈을 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신랑의 도리를 완성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란 믿음도 없으면서 단식과 같은 계명을 지켜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왕의 자리를 주기위해

나의 옷을 벗어 넘겨주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새 부대란 성령을 담을 합당한 그릇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령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나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내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고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가진 힘

‘오늘부터 나는 낮잠을 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소제목이 ‘잠만 잘 자도 저절로 인생이 바뀌는 하루 20분 낮잠의 기적’입니다.
전에 독일 어떤 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낮잠을 45분 간 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기억력이 4배나 높아졌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자 정지은 씨는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낮잠을 잤다’고 주장합니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한 이들이 낮잠을 자는 이유는 낮잠이 더 큰 영감과 의욕을 가져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3시간 자면 붙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뜻의 ‘3당4락’이란 말을 하며 살았던 것과는 참 대조적인 주장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대표적인 잠꾸러기였다고 하는데 “10시간미만의 잠을 자면 생각을 똑바로 할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보통 11시간 정도 수면을 했다고 하는데, 나머지 시간은 덕분에 다른 누구보다 집중하여 일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 외에도 찰스 다윈은 오후 3시에서 4시까지 반드시 1시간의 낮잠을 잤고,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는 영감을 얻기 위해 일부러 낮잠을 즐겼습니다.
특별히 살바도르 달리는 무거운 열쇠 꾸러미를 들고 낮잠을 잤는데 열쇠 꾸러미가 손에서 떨어져 잠에서 깨면 그때 좋은 영감들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톨스토이도 낮에 꼭 2시간을 잤고, 윈스턴 처칠은 전쟁 중에도 잠옷을 입고 2시간의 낮잠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낮잠은 게으름이 아니었습니다. 일부러 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일을 더 완전하게 수행하기 위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이 무기를 찾아낸 이들은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마약과 같은 것을 하는 예술인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그 두려움에 타락했던 이들도 있지만 이들은 낮잠이란 무기로 항상 좋은 결과들을 내었습니다.
이들에게 낮잠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이기는 남모르는 무기였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일상의 그림자처럼 우리를 쫓아다닙니다.
두려움은 ‘별거 아니네!’로 이길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별거 아니게 만드는 강한 무엇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은 내가 두려움쯤은 아무 것도 아니게 볼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임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과 같음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고양이인 것을 알면 쥐를 두려워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양이인 것을 모를 때는 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심지어 코끼리가 쥐를 제일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배 위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배는 우리 자신을 상징하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은 배를 뒤집어엎을 것과 같은 파도로 몰아칩니다.
바다에 파도가 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세상이 나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믿음’을 갖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배 안에 계신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믿음만 있다면 당신이 나서서 풍랑을 가라앉히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청한 것은 믿음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바다는 잔잔해지고 제자들은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라고 말하며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덕분으로 두려움을 넘어봐야 더 큰 두려움도 넘을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어떤 아이가 길거리에서 이상한 총과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데 쓰는 물건인지 잘 모릅니다.

그 아이와 일행이 무서운 조직에 잡혔습니다.
소년은 무심코 그 물건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 물건은 외계인이 잃어버린 총이었던 것입니다.
그 괴력은 나쁜 조직원들이 혼비백산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떤 영화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우리도 성체성혈을 통해 우리 안에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에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믿기만 하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잠들어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어 놓는 행위입니다.
여차하면 당기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만 있다면 내가 세상을 두려워함이 아닌 세상이 나를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걸 아낍니다 
그걸 아낍니다 인사할 때 허리를 조금 더 숙이면 보다 정중해집니다.
그러나 그걸 아낍니다.
말 한마디라도 조금 더 정중하게 하면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을 텐데 그걸 아낍니다.
도움을 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걸 아낍니다.
실례를 했으면 ”죄송합니다.” 하면 참 좋을 텐데 그걸 아낍니다.
오해를 했으면 겸손하지 못한 “제잘 못입니다.” 하면 좋을 텐데 그것도 아낍니다.
칭찬의 말도 아끼고 격려의 말은 더 아낍니다.
주어서 손해볼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아낍니다.
아끼지 말고 표현하는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마음에서 부는 바람 / 책 속의 한 줄》중에서 "진실"은 나의 입술로 "관심"은 나의 눈으로 "봉사"는 나의 손으로 "정직"은 나의 얼굴로 "친절"은 나의 목소리로 "사랑"은 나의 가슴으로 좋은 날들이 이어 지고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