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5/19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2. 20. 13:28

2019년 5월 19일 주일

[(백) 부활 제5주일]





복음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3ㄱ.34-35

방에서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신경>

오늘의 묵상


감사해야 사랑이 가능한 이유

이영지 씨는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지야, 네 남편 오늘 늘씬한 여자와 호텔서 나오더라.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았어. 여자가 스스럼없이 팔짱까지 끼던걸.”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의 남편이 맞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친구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나쁜 놈.’

그때 학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외칩니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영지 씨는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그놈의 밥. 한 번쯤 굶으면 병 나냐? 네가 차려 먹어!”

귀가한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기조차 역겹습니다.

그래서 거실로 나와서 잠을 청해보지만 상상이 상상을 낳아 밤을 하얗게 지새웁니다.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 더러운 철면피!’

그동안 속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오장이 뒤틀립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옵니다.

“언니, 형부가 어제 저녁 사줬어. 취직 축하한다고. 멋진 호텔에서.”

“멋진 ... 호텔?”

갑자기 지금까지 남편을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집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착실한 남편을 의심하다니.’

영지 씨는 번개처럼 일어나 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영문도 모른 채 아침도 거르고 나간 남편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영지 씨의 발걸음은 매우 가볍습니다.

[‘왓칭; 나를 바꿔놓는 요술 일곱 가지, 부정적 생각 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사랑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나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란 것이 사랑에 어떤 장애가 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영지 씨는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먼저 배웠어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항상 삐걱거려야합니다.


인간 안에는 아기(육체적 감정)와 성인(이성)과 하느님(마음)이 공존합니다.

아기는 생존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인간의 뇌 해마 끝 쪽에 위치한 ‘편도체(아미그달라)’가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기의 유일한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존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여깁니다.

엄마를 보면 안정감을 찾지만 엄마가 아닌 다른 존재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해지거나 두렵거나 화가 납니다.


아미그달라는 외적 요인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감정을 옷입혀

기억저장소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동물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뇌의 부위입니다.


만약 여우가 호랑이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큰일 날 것입니다.

인간은 5세까지는 전적으로 이 아미그달라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5세가 넘어서며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이 아미그달라가 자아내는 감정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생존만을 위한다면 부모나 형제 외에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위해 언어의 발달과 함께 ‘이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미그달라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통제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큰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제이슨 군이 물리교사를 부엌칼로 찌른 것입니다.

모든 과목 학점이 A인 하버드 의대 진학을 꿈꾸는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물리시험에서만 B를 맞은 것입니다.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칼을 가방에 숨기고 갔습니다.

물리 교사와 둘이 있을 때 점수를 올려 달라 청했습니다.

교사가 이를 거부했고 제이슨은 그를 칼로 찌른 것입니다.

판사는 제이슨 군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네 명이 법정에서 범행 당시 제이슨 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제이슨 군은 다른 학교로 전학했고 다른 학교에서 전교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 아미그달라의 감정에 지배당한 상황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신의 생존이라고 하는 목표에 빨간 불이 들어오게 하는 사람은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이 동물적 본성이고 이것을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면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현대인들이 많이 겪고 있는 ‘분노조절장애’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은 아미그달라가 생성해내는 이분법적인 감정은

90초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계속 솟구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생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지속하면 심장과 혈관이 버티어내지 못합니다.

부정적 감정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1분 30초면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분노가 몇 시간,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 때 일었던 감정을

계속 생각함으로써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살인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심장입니다. 마음인 것입니다.

서먹서먹했던 사람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미그달라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고 믿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갓 만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성을 믿으면 착각도 사랑이 되어버립니다.

이성은 매우 단순해서 그저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기만 해도

입에서 침이 돌도록 만듭니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이성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성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고 사랑에 감동되어야 움직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감사’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 때문에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데도

치매에 걸린 부모와 다정다감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뇌를 차갑게 합니다.

그러면 아미그달라의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부정적 감정들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신 이성의 작용을 뛰어넘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마르 15,34)

예수님은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성을 넘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미그달라에서 나오는 두려움의 감정과 ‘내가 왜 그래야 해?’라는 이성이

마음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래야 사랑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들로부터 마음을 안정시킬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여 그분께 영광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관 속에 누웠을 때

관(棺) 속에 들어가 본 적 있으세요?

죽어서 들어가는 관 말입니다.

저는 관 안에 누워본 적이 있습니다.

‘죽음 체험 하루 피정’이었습니다.

취재차 갔습니다.

사람들은 줄을 섰더군요.

관 속에 들어가려고 말입니다.

묘했습니다.

관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사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곁에 있던 그리스도상 아래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더군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확실히 다르더군요.

 보고만 있자니 너무 궁금했습니다.

저도 줄을 섰습니다. 제 차례가 왔습니다.

신부님이 관 뚜껑을 열었습니다.

계단을 밟고 제단 위에 올랐습니다.

관 속으로 한 발을 넣었습니다.

또 한 발을 넣었죠.

그리고 위를 보고 누웠습니다.

뒤통수가 바닥에 닿았습니다.

잠시 후 관 뚜껑이 스르르 닫히더군요.

틈새로 빛이 조금 들어왔습니다.

그 위로 천이 덮였습니다.

관 속은 이제 완전히 캄캄해졌습니다.

눈을 떠도 어둠, 눈을 감아도 어둠.

이런 게 무덤 속이구나 싶더군요.

 바깥세상에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직장도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내가 아끼는 모든 물건이 바깥에 있었습니다.

그때 실감이 났습니다. 뒤통수를 쾅! 치더군요.

‘아, 이런 거구나. 죽는다는 게.

바깥세상의 어떤 것도 이 안으로 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구나.’

관 속에 누운 저를 다시 봤습니다.

몸뚱이만 있더군요.

‘숨을 거두었으니 이 몸도 곧 썩겠구나.’

그럼 무엇이 남나.

‘아, 그렇구나!

마음만 남는구나.

그게 영혼이겠구나.’

 한참 지났습니다.

관 뚜껑이 열렸죠.

눈이 부시더군요.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주 짧은 체험이었죠.

그래도 여운은 길더군요.

‘잘 살아야겠구나.

그래야 죽어서도 잘 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며칠 전에 이해인 수녀를 만났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트위터 메시지를 묵상하며 썼던

글을 책으로 냈더군요.

책장을 넘기는데 교황의 기도가 눈에 띕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주여, 당신의 자비를 허락하시어,

저희가 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용서는 참 쉽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교황조차 이런 기도를 올렸으니 말입니다.

 이해인 수녀는 묵상을 통해 이런 댓글을 붙였습니다.

“저는 용서가 어려울 땐 미리 저 자신의 죽음을 묵상하며

‘상상 속의 관’ 안에 들어가 보기도 합니다.”

저는 속으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수녀님은 “‘내일은 내가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데’라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의외로 용서가

잘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삶의 열쇠가 죽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우리가 틀어쥐고 있는 모든 걸 놓아버리게 하는

거대한 포맷의 자리니까요.

그러니 죽음의 문턱까지 갔거나,

명상이나 묵상을 통해 죽음을 깊이 사색한 이들은

포맷한 자리를 체험합니다.

예수에게는 그게 십자가였고,

붓다에게는 보리수 아래 무아(無我)의 자리였겠죠.

 시인이기도 한 고진하 목사는 그런 삶을

“덤으로 사는 삶”이라 표현하더군요.

덤으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진다고 말입니다.

죽었다, 다시 사는 삶. 어쩌면 그게 ‘부활’이 아닐까요.

모두에 감사하고, 모두를 용서하는 삶.

그게 덤으로 살 때의 선물이라면 참 괜찮지 않나요.

살아서 내 발로 관 속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런 관이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우리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먼저 ‘

옳다고 여기는 나의 고집’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가 됩니다.

나의 고집이 무너질 때 내가 한 번 죽는 겁니다.

그게 진짜 관입니다.

들어갈 때는 힘들어도 나올 때는 홀가분합니다.

덤으로 사는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중앙일보/2014.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