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3/30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1. 14. 23:03

2019년 3월 30일 토요일

[(자)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행위를 욕구와 최대한 일치시켜라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 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식사 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라고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어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옳은 일이라고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 행위 때문에

스스로를 망칠 가능성이 커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두는 가치의 무게를 좀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으쓱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득보다는 실이 큰 것입니다.

인간에겐 교만이 가장 큰 해악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이렇게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율법학자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좋은 일을 다 하고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통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갓 세례 받은 아기는 지금 죽으면 착한 행위 없이도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나 착한 행위를 많이 한 바리사이는 그 행위들이 아무리 가치 있더라도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인간은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겁니까?”라고 물어봅니다.

물론 맘대로 살아도 됩니다.

아니 맘대로 살아야합니다.


내가 맘대로 살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맘대로 살 때 죄를 짓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선행으로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큰 죄가 아니라면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본성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사는데도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본성이 하느님과 매우 가까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공자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만 있다면 맘대로 살아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위에서도 진실 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을 못해서 자신들의 행위로 스스로를 속여 의인이라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본성으로 하는 행위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입니다.

착한일은 그것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고민해서 하면 본성으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아이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그 아이를 구해주는 것이 착한 행위인지 아닌지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이 있다면 구해주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합니다.

이것이 본성에 따른 행위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두 발로 걸어 다닐지 짐승처럼 네 발로 걸어 다닐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본성으로 하는 행위는 고민이 따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행위에 집중하지 말고 지금 당장의 욕구에 집중해야합니다.

내가 하는 선행이 내가 기뻐서 하는지 억지로 하는지를 살피면 됩니다.


억지로 선행을 하고 있다면 다음부터는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억지로 선행을 해서 으쓱해지는 것보다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천함을 보며

오늘 세리처럼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행위를 최대한 욕구와 일치시키십시오.

그런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또 그래야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변화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21,28-32).

아버지가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할 때 맏이는 싫다고 말했고 둘째는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과는 큰 아들은 회개하여 일하러 가고 작은 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욕구에 자신의 행위를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의 상징이고

작은 아들은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바리사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욕구가 있다면 위선적으로 행동하려하는 것보다 죄를 지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속지 않도록 우리는 욕구에 행위를 최대한 일치시키며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498-1499 | 대리석, 높이 171.6㎝ | 로마, 베드로 성당



미켈란젤로가 어느날 대리석 상점 앞을 지나다 거대한 대리석을 보고 상점 주인에게 그 대리석의 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이 대답했다.

"그 대리석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그것을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쳐다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보시다시피 가게는 비좁은데 그것이 공간을 다 차지하고 있어서 여간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그냥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그 대리석을 공짜로 얻어 자기 작업실로 운반했다.

그로 부터 1년후, 미켈란젤로가 그 대리석 상점 주인을 자기 작업실로

초대했다.

"와서 보시오. 그때 그 대리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그의 작품을 본 상점 주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은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껴안고 있는 상으로, 예수가 그녀의 무릎 위에 누워 있었다.

가게 주인이 물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조각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내가 이 대리석 앞을 지나치려 하는데 예수가 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지금 이 대리석에 누워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 내 모습이 드러나게 하라."

대리석 안을 들여다 본 나는, 어머니 무릎에 누운 예수의 형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숨어있었기 때문에 그 대리석이 그토록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지 예수가 시키는 대로 불필요한 부분을 쪼아냈을 뿐이라오."

그후 그 조각상은 바티칸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십 수년 전에 한

미치광이가 망치로 예수와 마리아의 머리 부분을 깨뜨려, 그 아름다움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경찰이 그를 체포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법정에서 그 미치광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켈란젤로가 아니기 때문에 그처럼 위대한 조각 작품을 탄생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괴할 수는 있었습니다. 어째든 나는 내 이름이 역사에 남고,

내 자신이 신문 전면에 실리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공했으니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재판관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단지 자기 얼굴을 알리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있는 예술품을

부순 것이었다.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러한 주제는 회화나 조각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 중에서 미켈란젤로의 이 피에타가 제일 유명하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이 작품은 안정된 삼각구도와 세부묘사, 그리고

유일한 미켈란젤로의 서명으로 유명하다.

피라미드 구도는 레오나르도에게 배운것이고 성모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은

그리스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예수의 신체 구조는 시체의 해부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어린 나이의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라고 좀처럼 믿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두른 띠에 자신의

이름을 조각해 넣었는데 그가 작품에 사인한 유일한 예이다.

한 정신병자로 인해 수난을 겪은 후 보수되어 베드로 성당 내의 여러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방탄유리상자안에 보호되어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