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2/26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1. 5. 14:27

2019년 2월 26일 화요일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산이 될 것인가, 바다가 될 것인가?


이번 주일에 사목총회를 휴식도 하지 않고 급하게 마치고

겨울신앙학교 다녀온 중고등부의 인사를 빨리 받고

평소보다 한 시간 반 늦게 운동장에 나갔습니다.


지난주도 바빠서 공을 차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한 시간이라도 운동을 할 의향이었습니다.

이미 경기는 하고 있었고 저도 한 팀으로 들어갔습니다.


차다보니, ‘어떻게 편을 이렇게 나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대 팀의 전력이 너무 좋은 것이었습니다.

공격을 하면 수비가 비고, 또 수비를 하면 공격이 비었습니다.

중간에 서자니 항상 중간에 서 있으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 분이 중간에서 공을 잡으면 상대팀에게 다 빼앗겨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중간에서 공을 받아 앞으로 연결해 주고 중간에서 공격도 먼저 끊어주어야 하는

중요한 포지션에 있으면서도 전혀 공을 찰 줄 모르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 분이 중간에 있는 한 우리 팀은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물론 사제로서 그런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어 잠자코 열심히 차기는 하였지만

속으로는 그 분을 보며 참 민폐를 끼치는 분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어제 한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분 형제님도 가끔 축구하러 나오시곤 하시는 분인데 경기에서 뛰는 것은 못 보았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들으니 그 형제님은 허리수술을 수차례 해서

횡단보도도 빨리 걸어 건너는 것도 힘겨워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 선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경기에도 들어가서 살짝살짝이라도 공을 찼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자신이 경기에도 뛸 수 있었다고 어린이처럼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팀의 어떤 분이

“그런 식으로 차려면 나오지 마세요. 완전히 민폐예요.”

라는 말을 했고, 그 분은 하도 열이 받아 그 이후로 축구뿐만 아니라

성당도 몇 달 동안 냉담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뜨끔 하였습니다.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 그 전 날 똑같은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가졌었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속으로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냉담하게끔 만드는

그런 생각을 가졌었다는 것 자체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가 교만해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를 판단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누가 더 큰 사람인지 서로 다툼을 하는 제자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자신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시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나무토막에 그리스도께서 달리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귀 등에 그리스도께서 타셨습니다.

버려지다시피 한 마구간에서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가난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는 나자렛 시골 출신 예수라는 한 인간을

먼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많이 배우고 돈 많고 힘 있는 자신들보다

사회적으로 훨씬 뒤떨어지는 스펙을 지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높일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대천사를 받아들였기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품을 수 없는 하느님을 그 마음에 잉태하셨습니다.


엘리사벳 또한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며 나이어린 사촌 성모님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시에 그리스도도 받아들여

성령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렇듯 상대 뒤에 계신 더 큰 분을 보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을 대신했고,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먼저 받아들여야 그리스도이든 하느님이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합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많은 물을 받아들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보다 높게 여겨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이라는 것은 나를 높게 만들어 상대를 내려 보게 만들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모든 인간보다 훨씬 높으신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가 평등합니다.


따라서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산처럼 높아져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신 밑에 있는 많은 사람을 판단하게 되어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전에 계속 오른 손을 위로 올리고 성체를 받는 사람이 있어서 은근히

‘저걸 고쳐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오른 손 밑으로 보이는 왼손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고

‘큰일 날 뻔했다.’라고 속을 쓸어내린 적이 있습니다.


먼저 판단하지 맙시다.

판단하게 되면 사람도 하느님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에 홀로 남게 됩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재의 수요일 사순시기


3월6일,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간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뜻있게 보낸다고, 2월25일부터 禁酒中입니다.
13번째인 50일간의 禁酒!
이번 사순시기에도
별일없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있읍니다.

사진은
성지순례여행시,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8구루의 올리브나무와
고뇌의밤을 기도로 보내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찰칵 또찰칵!
담아왔읍니다.

올리브나무
겟세마네 동산에는 8그루의 올리브나무가 있는데 그들의 나이는 확실치 않다.

몇몇 식물학자들은 올리브 나무들이 약 3000년 됐다고 주장한다.

요세푸스는 디도 장군이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하면서 모든 나무들도 함께

없앴다고 서술하고 있다.

만약, 이 나무들이 그 때의 파괴를 살아 남았으면 예수 당시의 나무인 것은 분명하다.

아니면, 예수께서 고뇌의 밤을 기도로 보내셨을 때의 나무들의 새싹임이 분명하다.

사순절,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의미!|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3,19)
사순[四旬]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날인 ‘주님 만찬 성 목요일’ 전까지다.
이 시기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슬픔의 때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죄를 씻고

새 사람이 되는 은혜의 때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는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 세계 교회가 재의 수요일에 읽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이 진리를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코린토 2서 5장 21절)
* 40일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 전날까지 46일에서 주일을 뺀 40일이다.
성경에서 40 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일을 준비하는 수련기간을 뜻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탈출과 홍해의 기적 이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 체험을 했으며, 예수께서도 전도활동에 앞서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하며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셨다.

그리스도교 초기에 신자들은 최후의 만찬, 예수 수난,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 3일’만을

지냈으며, 오늘날처럼 40일의 기간이 결정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325년) 때의 일이다.

전통적으로 사순시기는 예비신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는 최종기간이었으므로 더욱

경건하게 지냈다.
옛 사순시기 성가의 한 구절은 이러한 정신을 잘 보여준다.

“말과 음식과 음료를 삼가고, 잠과 놀이를 더 줄이세.

늘 깨어 지키세”(Utamur ergo parcius,/ verbis cibis et potibus,/ somno, iocis et arctius/ perstemus in custodia).

사순시기에 사제는 회개와 속죄의 상징인 자주색 제의(祭衣)를 입는다.

 
가톨릭 신자들의 사순시기 실천

사순시기 날짜는 부활대축일(부활절)을 기준으로 해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대략적인

시기는 보통 3-4월이다.
이때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불교의 동안거처럼 바깥출입을 삼가지는 않는다.

대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생활 속에서 속죄와 회개를 실천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실천들은 다음과 같다.

신자들은 기쁨의 노래인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을 하지 않고, 성가대 찬송이나 화려한 오르간 독주도 자제한다.

이 시기는 특히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는 때이기도 하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단식은 그릇된 욕망을 멀리하게 하며, 자선은 가진 바를

이웃과 나누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사순시기 담화를 통해 “모든 가정과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영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을 치워버리고 영혼을 살리는 모든 것 안에서 자라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것”을 당부했다.
대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생활 속에서 속죄와 회개를 실천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실천들은 다음과 같다.


1) 자선: 사순시기가 되면 한국교회의 각 교구와 지역 성당에서는 이웃돕기를 위해 해마다 사순 저금통 모으기, 사랑의 쌀 한줌 모으기, 헌혈 캠페인 등을 실시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사순시기 담화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참회행위, 곧

기도와 자선과 단식 중 단식을 통한 이웃사랑을 강조했다.
가톨릭 원조기구인 한국 카리타스(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는 매년 사순시기에 ‘사랑의 단식재’와 ‘공동헌금의 날’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2) 고해성사: 하느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고해성사’는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전통이다.
그런데 사순시기에 성당에 가면 저녁 늦게까지 고해소 앞에 줄지어 선 신자들의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모든 신자들은 교회법에 따라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고해성사는 신자 개개인이 하느님 앞에 쌓은 공로를 셈한다는 의미에서 판공(判功)이라고도 부른다.

3) 십자가의 길: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14개의 조각을

볼 수 있다.
‘14처(處)’라 불리는 이 미술품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 중 하나인

 ‘십자가의 길’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개 사건을 묵상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1-2세기 신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지나간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하도록 권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