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2/22 복음과 묵상

메옹 2019. 1. 4. 23:01

2019년 2월 22일 금요일

[(백)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잠시 묵상한다 >


오늘의 묵상



 

교회의 그리스도적 권위


처음 베네딕도 16세가 교황님으로 선출 되고 많이 들었던 말은,

요한 바오로 2세는 온화하고 잘 생기셨는데 베네딕도 교황님은

얼굴이 무섭게 생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부님이 현 교황님의 얼굴이 나온 강복장을 부모님께 선물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강복장을 액자에 넣어 안방에 걸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잠에서 깨어 처음으로 바라보는 교황님 얼굴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서

다시 떼어 거실에 걸었다고 합니다.


정말 겉만 보아서는 그 분이 정말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교회사에 보면 인간적으로도 잘못을 많이 저지른 교황님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교황님이 무류권을 발동하여 선포하는 것은

오류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류가 없다고 하니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에 대한 권위가 믿기 어려운 것은 단지 교황님만이 아니라

모든 주교, 사제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인간적으로도 잘못을 많이 하는 신부님의 비이성적인 지시에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전에 광주교구 최창무 대주교님께서 나주 성모 발현에 관련하여 엄한 교서를 발표하셨습니다.

그 곳에 가는 누구나, 성직자 수도자를 막론하고 파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 성직자를 파문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 측에서는 교회가 성모님을 박해한다고 더 크게 반박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지금도 신자들이나 수도원, 사제들을 막론하고

어리석어보이는 교회 지도자의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정말 실수하지 않을까요?

혹시 교회가 정말 성모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인 것 같으냐고 물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말하지만 올바른 대답을 듣지는 못합니다.


오직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보게 해 주신 분이 아버지시기 때문이지

베드로가 믿음이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든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고 또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완전하여 그를 교회의 첫 번째 수장으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불완전했지만

아버지께서 선택하시어 그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푸시기 때문에 그를 뽑은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좌의 권위는 하느님아버지로부터 오는 권위이지

자신의 권위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듯이 모든 성직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권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권위란 것이 보통 권위가 아닌 예수님 자신의 권위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느님나라의 열쇠를 주시는데

그 열쇠는 땅에서 매고 푸는 하느님나라의 열쇠입니다.


하느님나라를 들어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의 당신의 모든 권위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도 처음엔 교회로부터 공개적으로 미사를 하지 말라고 하여

삼년 동안이나 골방에서 혼자 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고 그래서 교회는 그 이후부터는 비오 성인을

자유롭게 미사하고 활동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오상까지 받은 사람이지만

교회가 자신을 왜 박해하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과 일치하지 않는 주교도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느님나라 열쇠 사용권을 잃듯이,

주교와 일치하지 않는 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는 주교로부터 그 권위를 받아 미사도 하고 죄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나가 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교황과 일치하는 주교, 그리고 그 협조자인 사제와 일치해야 합니다.

사제의 뜻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혹은 몰래 행해지는 모든 신심 행위들은

물고기가 물을 뛰쳐나와 물 밖에서 물을 찾는 격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보다 성경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성경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교회가 성경보다 더 먼저 있었고, 성경을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또 성경을 다 태워 없애도 교회는 존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도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누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남기셨던 것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이지

성경책을 쓰셨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한참 뒤에 쓰인 것이고 그 많이 떠도는 글들 가운데 몇 개만 정경으로 정한 것도 교회입니다.

개신교는 성경은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정한 교회는 믿지 않으니

스스로의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래서 교회를 세우고 당신의 모든 권위를 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에 대항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교회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



소설가 박경리씨는 운명하기 몇 달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다음은 노년의 박완서씨가 썼던 글입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 . .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두 분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던 분들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요.

가장 아름다운 인생(上善)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이라는 뜻입니다.

물처럼 살다가 물처럼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처럼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듯 싶습니다.
위의 두 분은 물처럼 살다 간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남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삶을 보여주었고,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을 남에게 과시하려 하거나

결코 다투려 하지 않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초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장강(長江)의 글을 쓰면서

그 글 속에서 인생과 사랑을 말했습니다.

말년의 두 분은 노년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나이 먹어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박경리씨는 원주의 산골에서

박완서씨는 구리의 어느 시골 동네에서

흙을 파고

나무를 가꾸면서

빛나는 노년의 침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노년의 행복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말했습니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달려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한 세상뿐입니다.

더러는 조금 짧게 살다가,

더러는 조금 길게 살다가

우리는 가야 할 곳으로 떠나갑니다.

두 분의 삶을 바라보면

이 소중한 시간을

이해하면서 살라고,

배려하면서 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둘도 없는 삶을

지난 날을 돌이키며 후회하기 보다는

남은 날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희망과 행복을 찾아 보자고 다독여 주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삶에서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에게조차

고마움을 느끼는 일상,

조그만 일에 끊임없이 감사함을 느끼는 노년,

그렇게 넉넉한 마음의 행복을 배우게 됩니다.

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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