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30일 목요일
2020년 4월 30일 목요일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無量寺 한 채
/ 공광규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 없어
나도 어처구니 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無量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를 냅니다
"막이 오르자 저녁 무렵 한 그루 나무가 서 있는 시골 오솔길.
에스트라공이 자신의 신발을 힘겹게 벗으려고 애쓰고 있을 무렵,
블라디미르가 등장한다. 별 의미 없는 듯 보이는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오간다. 불현듯 두 사람은 어떤 고도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음을 기억해낸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의 1막은
그렇게 시작된다.
작품 속에서 "고도를 기다린다"는 표현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고도'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에 대해선 끝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아예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대해 호기심을 끌 만한 이야기도 전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도를 기다리며"가 발표된 뒤 현재에 이르기 까지 '고도'의 의미를 묻고 있으며, 심지어 작가 베케트에게 직접 대놓고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에 대해 답해달라고 따져 묻기도 했다.
그러나 베케트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 베케트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고도'에 대해 혹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도'에 대해 한 마디라도 했다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거의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베케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고, 그는 침묵함으로써 작품을 지켜냈다.
종종 시인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특히 시의 의미 중 하나로 '진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의 풍토로 볼 때,
아래처럼 진술하긴 참으로 어렵다.
시인 공광규는 이 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 시는 실제 아내와 실제 있었던 대화를 진술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경험을 재미있게 구성한 이야기입니다.
무량사(부여군 외산면 소재)라는 고향 부근에 있는 절을 여러 번째 가던 중 창작동기가
확 발화하여 쓴 것입니다.
필자가 술을 먹거나 아이들 공부 문제로 아내가 잔소리하는 것은 집안에서 흔히 부딪히는 일입니다.
대웅전 꽃살문은 조계사회보에서 사진으로 본 것을 시 쓰는 과정에서 떠올린 것입니다."
아마 공광규 시인의 저런 말을 알지 못했다면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물론 독자들도 시인이 말하는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에 대해 상상했을 것이고, "무량한 만큼"이라고 맥없이 말해버린 시인의 멋대가리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가 되어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무량사 한 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들려주고,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려주는 시인의 아내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광규 시인은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 아마도 어느 부분에선 분명히 시인은
잘못한 것일 게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진정성이란 생각이다.
실제로 나는 옛 애인에게 "날 얼만큼 사랑해?"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가 가을 무렵이었기에 나는 "길가에 떨어진 낙엽만큼"이라고 답했었다.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건 맹세코 사실이지만 그녀는 나와 헤어진 뒤 좋은 남자 만나서 딸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나 역시 그녀가 결혼하고 몇년이 흐른 뒤 <젤소미나> 같이 순하디 순한 여자를 만나서 아들 딸 하나 씩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나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진정성은 이제 누가 있어 판단해줄 수 있을까?
< 옮긴 글>
※註': <젤소미나>는 1950년대 영화 <길 la strada>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