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과 묵상

2019년 11월 4일 월요일 복음묵상

메옹 2019. 8. 12. 13:31

2019년 11월 4일 월요일

[(백)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복음

<네 친구를 부르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을 초대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들의 한 지도자에게

12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오늘의 묵상

보상을 바란 자선은 변화의 힘을 잃는다

12세기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자선의 등급을 8단계로 나누었습니다.


1단계 : 억지로 베푼 자선(마지못해 주는 것; 주고 나서 후회하는 것; 보상을 바라는 선행)

2단계 : 즐겁게 베풀지만 충분하게 주지 않는 자선

3단계 : 즐겁게 베풀고 양도 충분하지만, 부탁을 하는 경우에만 베푸는 자선

4단계 : 즐겁게 베풀고 양도 충분하고 자발적으로 주지만,

받는 사람이 열등감을 느끼도록 행하는 자선(자신을 과시하며 주는 것)

5단계 : 받는 사람은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지 알지만, 주는 사람은 누가 받는지 모르는 자선

6단계 : 베푸는 사람은 누가 받는지 알지만, 받는 사람은 누가 준 것인지 모르는 자선

7단계 :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서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선

8단계 : 불우한 사람이 일어서고, 생계를 벌고, 자존심을 회복하고 그 사람도 자선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선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하는 자선은 낮은 수준의 자선입니다.

누가 주는지 모르게 하는 자선은 높은 수준의 자선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자선은 그 사람도 자선하는 사람으로 이끄는 자선입니다.

상대의 변화를 이끄는 자선이 가장 완전한 자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런 자선을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왜 보답을 바라지 말고 자선을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보상을 바라며 하는 자선은 상대의 변화를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내가 준 것을 되갚을 능력이 없을 때 양심이 있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게 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던지,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그 자선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있다면 그 자선 때문에 상대가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자선은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자선입니다.

한 양치기가 양을 몰고 집으로 가던 중 사자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을 봅니다.

너무 놀라 도망치려 했는데 사자는 앉아서 발만 앞으로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자의 발을 보았는데 커다란 가시가 박혀있었습니다.

양치기는 가시를 빼내어주었습니다.

얼마 뒤 양치기는 모함을 받고 원형 경기장에 던져졌습니다.

그 안에서는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자가 그에게 달려오더니 그를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수가 아무리 채찍으로 사자를 내려쳐도 사자는 그 양치기를 보호하였습니다.

양치기도 그 사자가 자신이 도와준 사자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간수에게 하고 간수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자

사람들은 사자와 양치기를 풀어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사자는 정글로, 양치기는 양치는 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아무리 사자라 하더라도 절뚝이며 걷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자는 자신의 방법으로 은혜를 갚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우리는 되갚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필요한 것이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은혜를 되갚으려는 마음을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보여주라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되갚을 수가 없기에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습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되갚을 수 없는 자선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도 가난한 이웃에게 그러한 자선을 해야 합니다.

가장 완전한 자선은 자신처럼 다른 사람도 되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선입니다.


가장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되갚을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북유럽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

북유럽 문화의 하나인 '얀테의 법칙'이란?
동화의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덴마크는 UN이 발표한 세계행복지수에서 연달아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덴마크의 이상적인 복지와 교육 시스템도 그 이유로 들 수 있지만  국민 행복의 토대에는 ‘얀테의 법칙(Jante Law)’이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통사람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얀테의 법칙’은 덴마크의 작가 악셀 산데모제(Aksel Sandemose)가  1933년에 쓴 소설 <도망자 그의 지난 발자취를 따라서 건너다 >에 나오는 10개조의 규칙이다.

이 10개조는 다음과 같다.

1)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2)네가 다른 사람들 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3)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4)네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자만하지 말라.

5)네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6)네가 다른 이들보다 더 중요할 거라 생각하지 말라.

7)네가 뭐든지 잘 할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8)다른 사람을 비웃지 말라.

9)다른 사람이 너를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10)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나를 남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내가 특별하다고 인정받다 이것이 결핍되면 사람은 불행해진다.

‘얀테의 법칙’을 살펴보면 요지는
‘너는 평균보다 낮은 사람이다’는 것이다.

어떤 누구라도 더 특별할 것이 없고 모두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타인에 대한 신뢰와 개개인을 존중하는 문화의 토대를 형성한다.

사람은 누구라도 평균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내가 평균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평균적인 생활을 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적 사회적 뒷받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덴마크 국민들이 행복한 이유는  부유해서가 아니라 ‘평등’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신뢰, 공동체적인 문화가 뿌리내린 것이 그 열쇠인 듯하다.

행복은 긍정에서 태어나고 감사를 먹고 자라며 사랑으로 완성된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