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5일 목요일
[(백)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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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가난한 집 가족과 부잣집 가족 간의 관계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가족 간의 관계가 아니라 두 인격체의 관계로 대입해 생각해도 괜찮은 영화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난한 우리가 어떻게 으리으리한 집을 차지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벌어서 그 집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의 굴레에서 피자 박스나 접으면서 그 집을 살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이것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집을 팔 의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하느님 나라도 우리가 최종적으로 살게 될 천국과 같은 집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나라의 집을 돈을 많이 모아서 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이 그만한 액수의 돈을 모을 수 없을뿐더러 그분은 그 나라를 우리에게 파실
의향도 없으십니다. 당신의 영원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이 노력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첫 조상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무화과 잎으로 두렁이를 만들어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그러면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공로만으로는 결코 그 나라에 살 자격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을 벌어서 집을 살 수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두 번째 방법은 강탈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죽이면 됩니다.
이것을 잘 표현했던 영화가 ‘숨바꼭질’입니다.
남의 집에 몰래 숨어살면서 결국엔 그 집 주인을 죽이고 그 집을 자신이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마치 뻐꾸기가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놓으면 그 뻐꾸기 새끼가 본래 그 둥지의 새끼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집의 주인으로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집을 차지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 집에서 자유롭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그 집이 그 사람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수갑 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 11,1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본래 주인이신 당신을 죽이고 하늘나라를 차지하려던 유다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본 주인을 제외시키고는 결코 온전한 방법으로 그 집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세 번째 방법은 그 집의 일꾼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한 일가족 모두가 그 집에 일꾼으로 취직합니다.
그러면 합법적으로, 또 월급도 받으며 그 집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합당하게 하늘 나라를 누립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잠은 다시 지하 단칸방에 가서 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집의 주인이 되지 않는 이상은 그 집의 모든 것을 내 것처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지옥에 가는 것보다 주님의 종으로서 그 집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일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종살이하는 것이 싫어 그 집을 다시 강탈하려 한다면 마귀가 됩니다.
아예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사실은 그렇게 주인의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것과 내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지내야합니다.
따라서 종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사는 아이는 그 부잣집의 딸의 과외선생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만약에 둘이 결혼까지 하게 된다면 그 아이는 그 집을 자신의 집처럼 누릴 수 있습니다.
주인의 자녀와 혼인하면 결국 한 가족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이 성립되려면 나도 그 집 자녀를 사랑하고 그 집 자녀도 나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 죽을 줄 알아야 둘이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내어주어야 상대가 자신을 내어주어 나는 그 상대의 심장에 살고
그 상대는 나의 심장에 살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차지한 첫 모델과 같은 분이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늘나라의 아드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시게 된 것은 그분의 뜻을 당신의 뜻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뜻이 욕구요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
라고 하십니다. 당신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당신 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주님의 뜻이 당신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하느님의 아드님과 한 몸이 되셨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영광스럽게 하실 것인지 성모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그 이전부터 차지하고 계셨던 분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당신 뜻을 봉헌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나라는 성모 마리아의 것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렇듯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신 구원의 모델이십니다.
그분이 하늘로 올라간 것만 경축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의 모범으로
그분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인지를 살펴야겠습니다.
오늘 나는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의 뜻을 잉태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살려고 노력하였습니까?
그러면 당신을 땅으로 내려오게 해 준 우리를 위해 당신이 계신 곳으로
우리를 올려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이 땅에 살게 합시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뜻은 나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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